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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y 10. 2020

제퍼슨 시대의 경제 상황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18

제3대 대통령으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이 당선됐다.


제퍼슨 대통령 시대


재직 기간은 연임을 합쳐 8년이었다(1801~09년).


의회는 공화파(제퍼슨 파)가 다수를 이루었고 대통령의 권한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대통령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제퍼슨 또한 의회의 결정에 힘을 실어 주었다(재직 기간 중 의회 승인 사항 중 거부권은 없었다).


대통령 시절의 제퍼슨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국무장관에 같은 버지니아 출신의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 미국의 제4대 대통령)을, 재무장관에 스위스 출신의 앨버트 갤러틴(Abraham Alfonse Albert Gallatin, 1761~1849)을 임명했다.


루이지애나(Louisiana) 매입을 통한 영토 확장


재임 기간 중 가장 큰 사건은 루이지애나(Louisiana) 매입이었다.


이 지역은 파리 조약 이후 스페인이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이 스페인을 합병(1801년)하자 다시 프랑스로 소유권이 넘어간 상태였다.


당시 미국은 루이지애나의 대표적 항구인 뉴올리언스(New Orleans) 항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로 협상단(제임스 먼로, 로버트 리빙스턴)을 파견, 이 곳의 매입 의사를 제안했다.


나폴레옹은 ‘아이티 반란’을 진압하느라 막대한 전쟁비용이 필요했다. 미국 협상단 으로부터 제안을 받자, 뉴올리언 스 항 대신 루이지애나 매입을 역제안했다.



1804년 루이지애나 표기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2,000만 달러로 뉴올리언스를 매입하려던 계획이, 500만 달러가 낮아진 1,500만 달러로 몇 백배나 넓은 영토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당연히 미국 입장에서는 거부할 수 없었고, 즉각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제퍼슨은 이를 시행할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없음을 알게 됐다. 즉시 수정헌법을 적용하여 1803년에 매입을 마무리 했다(쓸모없는 넓은 땅을 무리하게 매입했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남았다).


루이지애나는 캐나다와 멕시코까지 이어질 정도로 방대한 영토였다. 전쟁이나 인명의 손상 없이 1 에이커당 5달러라는 파격적인 매입가로 2배 이상 넓어졌다.


재무장관인 갤러틴은 이 지역을 매입하기 위해 국채 1,125만 달러를 발행했다. 채권은 평소 관계가 좋았던 베어링사의 도움을 받아 유럽의 은행가 헨리 호프(당시 암스테르담에 근거지가 있었음) 컨소시엄에 매각했다(베어링사 60퍼센트, 호프사 40퍼센트로 나누었다)


1804년 루이지애나 기념식   <출처 : 위키피디아>


루이지애나와 서부 탐사 지원 :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


이후 이 지역(루이지애나)을 파악하기 위해 군인 출신이었던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 1774~1809, 2대 미주리주 주지사)와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1770~1838, 제4대 미주리주 주지사)를 중심으로 한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Lewis and Clark Expedition, 1803~1806)를 파견, 조사에 나섰다.


갤러틴은 탐험대의 서부 탐사를 적극 지원했다. 이에 더해 도로와 물류망 개선에도 많은 투자를 진행했다.


이외에도 제퍼슨의 지시로 기존에 시행했던 해밀턴의 정책의 문제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해밀턴은 경제 정책을 실수하지 않았고 잘못한 것도 없다’는 의견을 전달하고 오히려 해밀턴의 정책을 준수해 나갔다.



앨버트 갤러틴(Abraham Alfonse Albert Gallatin)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울러 중앙은행인 '제 1미국은행'의 면허 기한(1811년)이 다가오자 적극 연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누구든지 재무부 장관을 한 달이라도 해본 사람은 연방정부의 재정 및 금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는 해밀턴의 의견을 따라간 것이다.


수출금지법(Embargo Act of 1807)의 발효와 효과


1807년 제퍼슨은 의회의 협조를 얻어 '수출금지법(Embargo Act of 1807)'에 서명했다.


이 법안은 당시 영국과 나폴레옹 간의 전쟁으로 미국의 상선이 지속적인 피해를 입게 되자 경고 차원에서 나온 법령이었다.


당시 영국 해군은 미국의 상선을 나포한 뒤, 미국 선원들을 자신들의 함대 병사로 강제 복역하게 하는 등 무리한 행동을 자행했다.


이런 행동은 미국 여론의 불만을 치솟게 했다. 제퍼슨은 이런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하여 미국의 중립성을 존중해 줄 때까지 두 나라와 미국과의 무역을 금지한다는 것을 법으로 공표했다.


이 법이 시행되자 미국의 상선은 유럽과 거래를 할 수가 없게 되었고, 물자 부족으로 인해 순식간에 영국제 수입품 가격이 폭등했다.


결국 밀수 무역이 성행하게 되자, 이를 통제하고자 연방정부의 함대가 해안을 경계했다.


아울러 캐나다 무역로를 차단하고 강력한 밀무역 단속에 나섰다. 미국의 경제적 손실이 점점 더 커졌고, 영국과 프랑스가 받은 손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워싱턴 D.C의 제퍼슨 기념관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법령은 1809년 철회하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국민이 부담했던 고통은 컸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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