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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y 20. 2020

1857년 불황(Panic of 1857)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28

미국의 승리로 끝난 '미국-멕시코 전쟁'은 광활한 영토의 확장을 가져왔다.


골드러시와 경제 호황기


1848년 확장된 영토 중 캘리포니아에서 막대한 양의 금이 발견된다. 연방정부도 조사관을 파견, 최종 확인을 한 결과 대규모 금이 매장되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삽시간에 이 소식이 퍼져 나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이른바 골드러시다.


운이 좋은 금광에서는 하루 평균 2,000달러의 수입이 생겼는데, 한 가정의 몇 년 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아무리 작은 금광이라도 하루에 20달러 이상은 수입이 생겼는데, 당시 동부 지역 근로자의 한 달 치 월급과 맞먹는 수치였다.



강바닥의 금 발굴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1851~55년간 이곳 금 생산량은 전 세계의 45%를 차지할 만큼 많은 양이었고, 미국은 세계 최대의 금 생산지가 되었다. 금의 공급으로 화폐 발행은 폭발적으로 늘어나 시중에 유통되었고, 덩달아 생겨난 유동성으로 철도 주식의 주가도 급상승했다.


주식 시장의 호황으로  갑작스레 떼돈을 번 이들이 속출하자 거품이 급속도로 커졌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생기는 법, 1857년 불안한 징조가 조심스레 나타났다.


1857년 캘리포니아 금광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더 이상 금의 생산량은 증가하지 않았다.


이에 더해 유럽의 크림전쟁(The Crimean War, 1853~1856)이 끝나면서 러시아의 농산물 수출이 재개되고, 상대적으로 미국 농산물의 수요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오하이오 생명보험&신탁회사의 파산


1857년 8월에 오하이오 생명보험&신탁회사(Ohio Life Insurance and Trust Company) 뉴욕 지부의 파산이 발생한다. 직원의 사기와 횡령으로 발생한 것이었고, 파산 당시 부채 규모는 약 700만 달러였다.




'1857년 불황'을 묘사한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소식이 퍼지자 금융 신용이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특히 철도회사의 재정상태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1857년 이전까지 철도회사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부로 대거 몰리면서 기존 철도회사의 운송이 많이 늘어나 수익성이 좋아졌다. 이에 철도 주변의 토지 가격은 상승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은행들이 앞다투어 대출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대출을 받은 철도회사 중에는 ‘종이철도(paper railroad)’의 단계에 있는 회사가 많았다. 이들은 실제적인 사업을 위한 자산이나 철도망도 갖추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고, 투자자본이 중단되면 사실상 무너질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였다.


 더구나 이 회사의 주가는 아무 검증도 받지 않고 쭉쭉 상승하기만 했는데, 풍부한 유동성(금의 지속적인 공급에 의한 지폐 발급량 증가)이 일으킨 거품이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거대한 금융 회사의 파산은 경각심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얼마 후 충격적 소식이 전해졌다.


센트럴 아메리카 침몰과 불황의 여파


1857년 9월, 노스캐롤라이나 앞바다에서 허리케인에 의해 센트럴 아메리카호(SS Central America)가 침몰한 것이다.


이 배에는 금괴와 금화 약 30,000 파운드(14,000kg, 14톤)가 선적되어 있었다. 이 금도 바닷속으로 같이 가라앉았다. 이 배의 승객 중에는 자신이 발견한 금과 함께 동부로 금의환향하는 사람도 있었다.



센트럴 아메리카호의 침몰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항해를 이용한 이유는  파나마를 거쳐 오는 길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대륙횡단철도 건설 전이라, 배를 타고 파나마에 도착, 기차로 파나마를 통과한 다음 정기선을 타고 뉴욕으로 오는 길이다. 이 배도 파나마-뉴욕을 운항하는 증기선이었다.


눈이 빠지게 금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배의 침몰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단순 해상 사고가 아닌, 경제위기 해소를 바라던 이들에게 던져진 충격파였다.


1844년 사무엘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 1791~1872)가 전신을 발명한 이후, 더욱더 빠른 속도로 뉴스의 전달이 가능해졌다. 미국 전역에 이 사건은 급속도로 퍼지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예금 대량 인출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자금 상환을 하지 못한 증권거래인 절반이 파산했고, 12월에는 약 5,000개의 회사가 뒤를 이어 사라졌다.



사무엘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 자화상  <출처 : 위키피디아>


뉴욕 월스트리트는 금융 위기 상태에 들어섰고 멀리 유럽에까지 여파가 미치게 된다. 경제 위축으로 1857년부터 1860년까지 연방정부의 세 수입은 3분의 1이 감소하였다.


이 당시 미국은 유럽보다 가장 빠르게 성장한 국가였지만, 부족한 산업존재하고 있었다. 기간산업에 필요한 많은 재료는 영국에서 수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도기적 어려움 등은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빠르게 극복해 나간다.


이 불황은 1861년 남북전쟁 발발 전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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