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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ka Oct 27. 2019

욕심부리지 않을 용기

욕심을 거스르는 데 용기가 필요할 줄은




기내방송이 나온다. 운이 좋게 편해도 너무 편한 비상구 좌석에 앉아있다. 그 편리함은 비상 시 수행해야할 엄중한 의무와 함께 부여받은 것이기에 내용이 무엇이 됐든 열심히 들어본.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도록 노력하겠으니 협조 부탁한다는 내용인듯 하고, 그 대상은 조금만 힘을 줘도 와사삭 부서질 것 같은 플라스틱 컵인듯 하다. 방송까지 했으니 협조해보기로 하고 비좁은 자리 구석에 물을 마셨던 컵을 잘 끼워둔다. 다음 식사가 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 잘 버텨줄지 모르겠지만….


얼마 안되는 기내식을 빠르게 해치우고 한 숨 자려 눈을 감으니 면세품 인도장 앞에서 보았던 어마어마한 포장재들이 떠오른다. 물론 내가 구매한 물건에서 나온 것들그 부피가 적지 않았다.


면세점은 보통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가기 일쑤인데 이번엔 뭘 그렇게 바리바리 샀던가, 떠올려본다. 자연스레 얼마를 지불했는지도 셈해본다. 값이 가장 많이 나가는 건 가방이었다. 무난하게 들고 다닐 무채색 핸드백이 없어서, 혹은 샀지만 너무 저렴한 것을 구매한 나머지 군데군데 해졌거나 수납공간이 충분치 못해서였다. 출발 전부터 온오프라인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꽤 오랫동안 가격을 비교하고, 디자인을 비교하고, 브랜드를 비교하여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제품을 온라인 면세점에서 구매했다.



에코백이 넘쳐나는데 또….

문득 행거 한 쪽 가방걸이가 비행기 소음과 함께 어른거린다. 거기 걸린 것들 중 가죽 소재이거나 톡톡한 원단으로 ‘잘’ 만들어진 가방은 세 개도 채 안된다. 이사를 도와주러 온 친구들도 간첩이냐고 물을만큼 짐이 간소해서 나름대로 미니멀리즘을 잘 실천하며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정신없이 살아온 몇 년을 되돌아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가방걸이에는 겹치고 겹쳐져 툭 건드리면 후두둑 떨어질만에코들이 넘치게 걸려있었다. 내가 돈을 주고 산 건 하나도 없다. 전부 컨퍼런스 기념품이거나 증정품, 당첨품으로 받은 것들이다.


자주 들고다는 것엔 뱃지나 고리를 달아두기도 했다. 겨우 세 개 뿐이지만.


맥시멀리스트도 아닌데,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들거절하지 못했다. 공짜로 준다고 하니 순간의 욕심에 눈이 반짝- 하는 것이다. 욕심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눈을 멀게 한다.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못하게.



아, 이 얼마나 소비적인가.

한 편으로는 되도 않는 합리화를 해본다. 예전에는 캔버스 재질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아이보리색 에코백뿐이었는데 요즘은 색도 디자인도 어쩜 그리 다양한지, 그래서 자꾸 받아오는 것인지도 몰라. 특히 지난 달 컨퍼런스에서 받아온 것은 정말 새로운 디자인이었지. 새까만 천에 형광 주황색으로 프린팅했다니! 이건 꼭 받아야해!


이쯤되면 '에코'니 '친환경'이니 하는 것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비단 에코백 뿐만이 아니다. 무선충전기만 벌써 세 개쯤 받았고, 보조배터리도 네 개째 가지고 있다. 펜은 이미 연필꽂이가 터져나갈 정도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다하면 냉큼 받아오고 안줄 것 같으면 달라고 안달이다.


필요한 것 이상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나를, 내 공간을, 이 사회와 지구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조금 오버해보자면 ‘망치는’ 일일진대, 이 얼마나 소비적인가. 이 어리석은 일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그저 본능에 순응하다니, 패배한 것과 마찬가지다. 혹은 합리화에만 유능한 겁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런지.


물(物) 앞에 무력해지던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문득 '용기'가 필요한 일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너무 뻔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용기'에 대하여

그렇게 뜬금없이 '용기'에 대해 생각해본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용기’는 뭘까.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냐면 그것은 그저 필요할 때 생겼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는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그것을 뚜렷히 인지한 채로 발휘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의식도 못한채 ‘용기’가 생기고 사라졌을까 되짚어본다. 내 생각 하나 제대로 표현 못하던 9살, 담임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 발표를 시키던 순간. 체육엔 영 소질이 없던 중학교 2학년 체육시간, 생전 처음 뜀틀 앞에서 도움닫기에 망설였던 순간. 수업, 과제, 시험에 치이며 유학을 꿈꾸던 대학교 4학년, 오랜 고민 끝에 전혀 새로운 전공과 커리어에 도전해야만 했던 순간.

나 스스로를 뛰어넘어야하는, 목적을 달성해야하는 상황에서의 용기였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용기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가장 빠르고 쉽게 떠오르는 것들일테다.


한편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적인 문제가 엮여있는 상황에서도 용기가 필요했다. 가치관이 잘 맞지 않았던 연인에게 이별을 고해야 했던 순간.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혹은 미안하다고 해야 했던 순간. 누군가의 부탁이나 요구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순간. 부조리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고 고칠 것을 요구하는 순간.

상대방의 감정이 걸린 문제인 동시에 나의 감정 혹은 서로의 감정과 관계가 연관된 문제이기에 용기를 내야했던 순간들이다.


욕심부리지 않을 용기

이제 새로운 ‘용기’를 생각한다. 내 안의 욕심을 거스르는 용기.


이것은 앞에 나열했던 것만큼 어렵고 심각한 상황은 아닌보인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들, 그러나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들을 ‘놓아주' 것이 전부다. 집에 넘쳐나는 플라스틱 보틀, 에코백, 혹은 일회용 수저를 준다는 것을 단 다섯글자, “괜찮습니다.” 로 대답하는게 뭐 그리 힘들겠는가? 이것은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해 마음 상하게 하는 일도 아니고, 에너지를 쏟아부어 내 한계에 도전하는 일도 아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그저 내 안의 욕심과 본능을 조금 진정시키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혹독한 절제라던가 금욕생활을 달성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필요 이상의 것, 뒤돌아서면 조금의 후회가 드는 것들이 주는 유혹에서 자유해지고 싶다. 득될 것 없는 '욕심'이라는 본능에 넘어지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 작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에도 어쩌면 용기가 필요 할는지 모른다.




어쩐지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저녁식사가 준비되고 있다. 잠들기 전 좌석 옆에 두었던 플라스틱 컵은 웬일인지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몹시 귀찮긴 하지만 갤리의 생수로 한 번 헹궈내 다시 쓸 준비를 해둔다.


이 귀찮은 일을 하는데도 한 톨만큼의 용기가 필요했음을 인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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