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역 <순대실록>에서 혼밥을
오래전 일이다.
직장에 들어와서 함께 일하는 여사님이 소개팅이란 것을 해주셨던 때. 차도 없어서 한 여름에 걸어서 식사를 하러 갔던 어수룩하던 30대 초반 남자가 참 재미없게 이야기를 했던 때다. 산보다는 바다를 즐겨 다녔던 성향에 두 번째 만남에서 남원에서 제법 높은 뒷산을 껑충껑충 뛰던 여성이 불과 세 번째 만남에서 먹었던 것이 순댓국이었다.
어찌하다 보니 인연이 길지 않아서 끝나 버린 추억. 그래도 종종 나의 첫 소개팅 썰을 풀 때면 회자되는 10년 전 일이지만, 가끔 생각해 보면 소개팅 남자와 순댓국에 소주를 마실 생각을 했다는 것이 멋진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서 소주 한 잔의 맛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경험해 보니 희귀한 인연이었다고 생각된다.
종종 먹는 순댓국을 서울에서 먹은 기억은 좀처럼 없다. 주로 면이나 수제비를 즐겨 먹기에 국밥은 종종 눈에 보이는 곳에서 끼니를 때우기 위한 방편으로 먹긴 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서울에서도 젊은이들의 성지라고 하는 혜화에서 순댓국을 먹은 기억이 떠올라서 혼자라도 혜화를 가게 되면 가는 곳이 바로 <순대실록>이다.
흔히들 시장통에서 할머니나 대를 이어서 자녀 내외가 함께 장사를 하면서 쟁반에 툭하고 내려놓은 국밥 그릇을 떠올리다가 외식하는 느낌으로 순댓국을 먹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 어디 좋은 레스토랑에 온 기분으로 국밥을 먹거나 순대를 먹으면 그 맛은 또 어떤 느낌일까? 그런 신기한 마음으로 가봤던 식당인데, 은근 사람도 많으면서 맛도 보장되는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이 식당은 아까 말한 인연이 있었을 쯤에도 내가 먹었던 기억이 있었으니까. 그전부터 유명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용산역에서 내려 신용산역 전철을 타고는 혜화역에 내려서 낙산공원에 야경 사진을 찍으러 올라가는 길이었다. 유명한 음식점들이 많았지만, 어쩐지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싶어서 오래전에 방문했던 <순대실록>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람들이 가득했고, 1인을 위한 독서실 책상처럼 된 1인용 테이블이 있었다. 가게의 사정을 생각하는 나는 바로 1인용 테이블에 앉아서 정식 하나를 주문했다. 국밥에 순대가 접시로 나오는데, 순대를 좋아한다면 그냥 먹어도 좋고, 국밥에 추가해서 넣어 먹어도 좋은 든든한 구성이었다.
국밥이 나오기 전에 일단 순대가 나왔다. 채소에 혹은 쌈장에 순대를 하나씩 먹어보고, 양파도 씹어서 느끼함을 잡아도 본다. 이미 식당에 들어오기 전에 여름의 열기를 흠뻑 받고 왔지만, 어쩐지 국밥의 뜨거움은 보양을 위한 충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럴까? 일단 보글보글 끓어서 나오는 국밥그릇이 뜨겁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숟가락이 국물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시원하게 한 입 먹고 나면 부추나 다른 것도 하나 둘 넣어가면서 내 입맛에 맞게 세팅을 하고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다.
아마 이런 느낌은 남자만이 느끼는 감성은 아닌 것 같다. 과거에 소개팅 여성이 피순대에 소주 한 잔을 쫙 들이켜는 모습이 가식이 없었던 것처럼. 내 옆자리에도 어느 여성은 혼자서 국밥을 조신하게 하지만 야무지게 먹고 있었으니까. 남녀노소를 떠나서 맛의 감동은 취향 따라서 비슷한 것이겠지.
국물을 떠먹고, 순대와 반찬을 하나씩 집어 먹으면서 좁은 1인용 테이블에서 딱 내가 있는 공간은 주변은 신경을 쓰지 않는 독립된 공간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독서실에서 순댓국을 차분하게 공부하는 학생 같이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아마도 공원에 올라갈 생각이 없었다면, 이미 소주 한 병을 시켜서 반주를 하고 있었겠지만, 더운 여름에 퍼질 것 같아서 꾹 참고, 그릇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배부르게 먹었다.
국밥은 참 신기하다. 가격도 그리 비싼 것도 아닌데, 다양하고, 맛도 좋고, 영양도 좋으면서 혼자 먹을 수 있다. 또 사람이 늘어도 소주잔 하나 더 올리듯이 테이블에 앉아서 여럿이서 재미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니 말이다. 맛있게 즐거운 분위기를 함께 먹는 느낌이랄까?
뭐 혼자도 나쁘지 않았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누군가와 함께 소주 한 병 마시면서 차분하게 먹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명절이 다가오는 오늘 테이블에 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