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3일
"준우야, 나오신다."
강대리의 곁눈 아이라이너 끝에 차분히 다급한 목소리가 매달린다. 그 목소리를 따다 제 오른쪽 귀에 건 신사원이 기다렸다는 듯 내달려 사람 더미로 간다. 아저씨 더미로 간다. 그중 한 사람. 비쩍 바른 하얀 사람을 멈춰 세우고는 앞손을 모았다 뒷머리를 긁적였다 두어 번 반복하더니 꾸벅 인사하고 내달려 돌아온다.
"뭐라셔?"
"이제. 그 정도는 대리님이 알아서 하라고..."
"아."
소회의실 의자 위 우뚝 솟아있는 뿔테 돋보기안경은 이제 강대리의 손에 제 운명을 맡겨야 한다. 작은 소리에도 꿈쩍꿈쩍하며 볼까지 흘러내린 스무 번째 땀방울을 그대로 툭 떨어뜨리는 어린 양이다. 같은 시간 사무실에서는 양다리를 60도 정도 벌려 앉은 강대리가 키보드 위에 두 손을 걸쳐두고 눈동자만 굴려가며 때때로 옆을 살핀다. 시선을 느낀 신사원은 이따금씩 들썩이는 강대리의 발뒤꿈치가 탁하고 땅에 닿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공연히 허공을 바라본다. 강대리의 떠는 다리가 멈춘다.
"준우야."
"네."
"너 회의자료 얼마나 했지?"
"...유, 육 개월?"
"5개월 차 아냐?."
"아, 아니죠! 6개월이죠! 10, 11, 12, 1, 2, 3."
"야, 아니지, 11, 12,... 그래."
"우리, 신입한테 회의자료 줘볼까?"
이마꼭대기부터 환하게 번져나는 환희의 빛이 신사원의 눈과 광대, 입술을 타고 목까지 내려친다.
"엇, 어엇, 대리님! 와, 누나! 대리님! 아니, 누나! 와, 누나!"
발뒤꿈치가 미처 땅에 닿지 못한 채 카페 종이 빨대처럼 길쭉이 꺾인 다리로 부동자세가 되어버린 강대리의 왼쪽 어깨에 준우가 내뿜는 공기가 툭하고 매달린다. 팔꿈치로 툭 치나 싶더니 다시금 무게 실린 공기가 매달린다. 엇과 대리님과 누나밖에 발하지 못하는 모자란 사원 하나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탁'하고 일어서자 그 반동으로 의자가 밀려나 뒷벽에 부딪친다. 예상외로 큰 소리로 부딪친 탓에 사무실의 눈이 뒤를 돌아 소리의 진원지를 찾는다.
"죄송함다. 죄송함다. 일들 하십쇼. 죄송함다."
구부정하게 파닥이며 제 의자를 주워 돌아온 준우의 새빨간 귀가 눈에 들자 강대리의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좋냐?"
"넵."
"회의 자료 쟤 주면 넌 뭐 할 건데?"
"아, 뭐라도 하겠죠."
"그니까 뭐?"
"아, 뭐, 그, 사심위! 사심위요!"
"너 못 해, 그거."
무심한 눈으로 툭 던진 담담한 평가에 달아오르는 준우다.
"그, 그럼 그거! 대정부! 국회의원실! 내가 갈게 내가!"
"그건 나도 못해."
칼날 같은 자기평가다.
"이... 이사회?"
"그건 인사 꺼고."
"겨, 경평! 공시, 공시 그거!"
"그건 내 꺼고."
벽에 맞아 탱하고 돌아오는 고무공처럼 단단히 반사되고마는 준우의 의지다. 천장에 삐딱하게 내걸린 전략기획팀이라는 명패 아래에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그는 심드렁 반 고민 태세로 돌아간다. 그때였다. 그의 마음이 곧은 길을 가고자 선택한 것은.
"대노조 어때?"
강대리의 한 마디에 파랗게 식은 그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2초간 광대처럼 입의 양끝을 귀에 걸었다 풀더니 여느 때처럼 멍텅한 막내로 돌아와 키보드에 두 손을 얹고는 모니터를 응시한다.
"대리님, 저 그냥 회의 계속하겠습니다."
"강주임! 강주임!"
이책임의 껄렁한 부름에 정신을 차려보니 먼 곳에서 회의를 마친 차과장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문장을 대신하는 차과장의 모습이 어색하기 그지없다.
"뭐 해? 또옥바로 앉아서."
"아, 아닙니다."
"사심위때매 그래요?"
"아, ...아, 예."
"으이고, 한차장님도 고새앵 고생한다. 몇 번째냐 그거."
이책임의 넘겨짚기를 타고 위기를 모면한 강주임이다. 강주임은 기부분장 부임 후 제법 자주 공사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강대리라는 호칭 때문이리라. 지난주 정책임과의 티에프실 회동 이후 먼 기억 속 준우까지 끼어든 탓은 아닐 것이라 애써 현실을 외면해본다.
"저, 책임님, 잠시 커피 한 잔만 사오겠..."/ "훈아!"
어물쩡 일어서려는 강주임의 귓가에 강한 충격파가 몰아친다. 본능적으로 훽 고개를 돌려 훈이를 부르는 앙칼진 목소리를 추적한다.
"누구?"
"훈이요, 고석훈이. 인사 아니던가?"
"난 또 누구라고. 석훈이 그 자식 지난달에 부산 갔잖아."
"하이씨, 아 왜 걘 또 부산을 쳐가, 가길!"
멀어지는 대화 속에서 정신이 아찔해진 강주임은 갑작스러운 접촉사고 후 귓가에 맴도는 삐- 소리에만 집중하는 피해자처럼 눈을 두 번, 세 번 꿈뻑인다.
"...라고."
"아, 네?"
"커어피, 하안 가득 사 먹고 오시라고요, 강주임니임."
이책임의 빈정댐에도 전혀 타격이 없는 강주임이다. 두 눈을 꿈뻑이며 굳이 파티션 뒤로 돌아 먼 길로 밖을 향해 나서는 강주임의 모양새가 신기하다. 강주임이 사라지자 왜인지 먼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던 아저씨들 여럿이 여기저기에서 조용히 가라앉는다.
"차함, 저 왜 저래? 카페인 중독이라니까."
한국에는 이름이 훈으로 끝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나는 죄인이니까. 죄인은 죄인답게. 처절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면 될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