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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한해달 Sep 09. 2023

다입자 바이러스

2020년 3월 19일

 "어이고오, 우리 택이, 인마. 잘 왔다."

 "아닙니다."

 "맘고생 좀 했겄어."

 "아닙니다."

 "거, 재희, 거기, 거기가, ...좀 그래."

 "아닙니다."


 작고 누추한 산골 공단의 골방에서 한 중년이 운 좋은 꼬마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멋쩍은 듯 고개를 휘휘 짧게 돌리며 삐져나온 코털처럼 비스듬히 흩어진 슬리퍼를 찾아 신고 꼬마와 미묘하게 어긋난 시선을 맞춘다.

 

 "...아부지는 잘 계시고?"


 꼬마의 단정한 뒷모습은 잠시 주변을 살피고는 이내 안심한 듯 환한 미소로 화답한다.


 "그럼요, 아저씨. 아빠 요즘 다시 골프 시작하셨어요."


 이번 주에도 결론이 나지 않은 사심위, 취합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 회의자료, 조직개편 이후의 살엄음판 같은 부문 분위기. 강주임은 도통 자리를 뜨지 않는 송수석을 피해 뒤로 뒤로 굽이치는 복도를 무심히 따라나선다. 이 길이 더 길면 좋으련만, 조그마한 유령 같은 걸음의 연속이 곧 끊기 복도 끝의 자그마한 문이 코앞에 들이닥치고 만다.


 "어? 강주임님?"

 

 멀뚱히 서 고개를 드니 그곳은 오랜만의 제 2운영실, 제 사유지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던 정책임이다.


 "아, 책임님. ...아."


 짦은 복도가 야속하다. 기나긴 어둠 속의 복도라 여겼건만. 기재부문 뒤의 골방은 그리 아득히 먼 곳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측은한 동공을 강주임의 가슴팍에 장전한 정책임이 단출히 입을 연다.


 "들어오세요."

 "아, ...예."


 딸깍 문이 닫히니 단절된, 아니, 분절된 정사각 차원이 꿉꿉한 커피 포자로 뒤덮였다. 오래된 잔향과 방치된 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은 진한 향기가 습도를 높인다. 강주임은 정사각의 자유 속에서 마를 대로 마른 정책임을 애써 못 본 척하며 데스크 반대편 소파로 가 두 다리를 모으고 다소곳이 앉는다.


 정책임은 심장이 말라비틀어진 강주임을 흘깃 보고는 구석의 싱크대에 커피를 왈칵 쏟아붓더니 알싸한 얼그레이를 두 잔 준비해 굳이 먼 걸음을 옮겨 소파로 와 앉는다. 인사도 감상도 없이 홀짝이는 가향티가 질척한 커피향을 이길 때쯤 어색한 음성 언어가 제 역할을 하려는 듯 더듬더듬 기어 나온다.


 "일이 많으시죠?"

 "뭐, 언니랑 같죠 뭐."


 홀짝이는 베르가못향이 새삼 활개를 친다.


 "전 같질 않네요."

 "전 같질, ...않죠."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가 대화거리를 찾듯 애매한 공기가 감돈다.

 

 "사심위가...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어후, 한수석요?"

 "...네."


 찻잔에 투명한 립밤이 겹쳐 묻어난다.


 "그 양반은 차암. 차암, 그래. 글을, 너~어무 못 써."

 "안은 나쁘지 않은데 글이 평가를 못 받으시니."

 "그쵸?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죠? 저 정말 한수석님 사업 괜찮다고 보거든요. 사람이 이상해서 그렇지."

 "네."

 "글만 좀 써오면 얼마나 좋아요, 안 그래요?"

 "그렇죠."

 "이책임님이 팔로우 할 땐 좀 낫더니."

 "..."

 

 미묘한 정적이다. 정책임은 모처럼 대화가 이어지나 했는데 혹시 내가 뭘 잘못 건드렸나 애먼 찻잔에 입을 대고는 두 눈을 홀짝인다.


 "거기도 영..."

 "아? 그래요?"

 "맞춤법 규정도 모르니."


 그렇다. 잠시 돌이켜보는 정책임이다. 이책임은 영업 시절 언제나 마감 시간을 잘 지켜 자료를 주곤 했다. 하지만 좋은 자료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얼핏 든 것이다. 회의 자료의 수많은 오류를 고쳐내느라 이책임의 난장이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보고 부서에서 같이 일한다면 어쩌면 이책임의 이미지는 지금과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힘드시겠다."

 "네."

 "스마트팜건 기억나네요."

 "네?"

 "작년 하반기 사심위 때였는데 샐러드를 셀러드라고 쓰셨더라고요."

 "...아."

 "사내벤처 때도 단순 오타라기엔 처음부터 끝까지 표기를 잘못하신 게 많았었던 기억이에요."

 "그래도 ...그건 외래어니까."

 "우리말도 틀리세요?"

 "돼랑 되를 구분 못하세요."

 "..."

 "대랑 데도 구분 못 하시고."

 "...어떡해."


 정책임은 영업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었던 이책임의 새로운 면모를 알아가는 중이다.

 

 "그..."

 "...네?"

 "그..., 당연히 어미도 신경 안 쓰시죠?"

 "아, 네 그건, 뭐."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잖게 받아치는 강주임이다. 단어를 보지 않는 사람이 문장을 볼 리 없다. 기조실 이름이 무색하게도 이책임은 여전히 글 따위 형식이요, 모양 따위 비효율적 디자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영업부터 왼쪽으로는 다 그러시더라고요. 그것 때매 저 혼자 매주 일요 출근 했었거든요."

 "저는 일요 출근은 안 해요. 토요일 첫차 타고 퇴근해요. 그래야 토, 일 쉰다는 느낌이 들어서."

 "저 무급봉사 질려서 연차 쓰고 일한 적 있잖아요. 적어도 돈은 받고 일하는 기분 내려고요."

 "현명하시네요."


 구 담당과 현 담당의 자조적인 대화가 그간의 벽을 허문다. 보고 부서의 지박령 둘은 이제 서로가 궁금하다. 강주임은 정책임의 티에프에 대해, 정책임은 조직개편 후의 기재부문에 대해 알고 싶다. 췌장부에 단단히도 고정된 호기심이 서서히 고개를 든다.


 "감사부문장님. 자주 드나드리더라고요."

 "아, ...네."


 "재무처장님이 좌천되셨다고..."

 "아, ...네."


 "유부문장님이 기태림 부문장님 말씀하셨어요. 기획 일 오래 하셨다고."

 "아, 그러셨군요."

 "아저씨들 입에서 언니 말 나올 때마다 움찔해요."

 "왜요?"

 "그냥, 아는 사람 얘기 나오니까. 아, 요즘은 준우형 말도 나와요."

 "...아."


 지칠 대로 지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유일한 인간 자원. 준우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래, 한 번 파헤쳐볼까.' 하는 야심 찬 욕망이 고개를 든다. 마음이 앞선 쪽은 정책임이었다.


 "사내모델 할 때만 해도 그냥 좋은 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

 "노조에 빠질 줄이야."

 "..."

 "동기시라고."

 "네, 안 본 지 워낙 오래돼서 이젠 남이죠 뭐."

 "언니는 준우형 어떻게 아세요?"

 "..."

 

 강주임의 닫힌 입을 살피다 무언가를 툭 놓은 듯 말을 이어가는 정책임이다.


 "준우형도. 기획이었죠?"


 기재부문 말석에 앉은 강주임이다. 끝없는 뒷 복도로 빨려 들어가는 유부문장과 쏭수석을 인지 지 오래다. 그들의 잦은 티에프실 출입이 신경 쓰일 무렵부터였을까? 되살아나는 공사의 기억에 오한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 정책임은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알고 있을 터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가. 어디까지 얻을 수 있나. 강주임은 '흐음'하고 숨을 들이쉰 채로 잠시 멈춘다. 복부로 끌어당긴 공기가 경추를 곧게 끌어올린다. 잠시 정면을 보다 아래로 향하는 속눈썹이다. 곧 굳은 입이 가로로 단정히 벌어진다.


 "하나 아래였어요, 준우가."


 소외된 두 입자가 서로를 위해, 혹은 경계하기 위해 일부러 벌려놓았던 틈이 진득한 치즈처럼 얼기설기 늘여 맞붙으며 액세스 안의 작은 사회가 또 하나 만들어지고 있었다.




 

2020년 3월 19일 목요일 맑음


 <시설관리부문 쏭수석> 태림이형

 이 양반 이거 말만 앞서는 건 아니겠지? 내가 증말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여기까지 와서 이 지*이네. 뭐, 되기만 하면야 직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이거야. 똥물 뒤집어써도 골드만 빼내면 된다 이거거든. 이미 한 번 당한 거 두 번 당한다고 더 아픈 것도 아니니까.


 <기획재정부문 강주임> 기부분장님

 기팀장님, 유팀장님, 쏭대리님. 기부문장님, 유부문장님, 쏭수석님. 나, 정책임님, 그리고. 유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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