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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한해달 Sep 14. 2022

거미줄

2020년 3월 17일

 "미리씨, 응? 회의 자료 좀 줘봐."


 부문장들의 부재로 열리지 않은 회의의 자료를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나 요청하는 송수석이다. 강주임은 서면 회의로 진행된 금주 자료를 뒤늦게 찾는 송수석이 영 껄끄럽다. 필요하면 메일함을 확인해도 될 텐데 굳이 달라는 것은 인쇄본을 받겠다는 심보다. 파쇄하지 않은 자료가 한 부 있어 시간 오차 없이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시설 꺼, 이거, 응? 다 본거여?"

 "네?"

 "아니, 이런 건 도면을 첨부해야지. 응? 거, 누가, 응? 시설 쪽 아님, 누가 알어. 응? 아니, 우리가 뭐, 응? 다들 뭐, 기술사여?"


 새삼 지난 회의 자료로 트집을 잡는 송수석의 행동이 의뭉스럽다.


 "서면 진행이어서 첨부는 최소한으로 했습니다."

 "아니, 뭐, 응? 서면이면, 응? 회의도 아녀? 자료는 자료대로 다아 받아둬야는거여."

 "...죄송합니다."


 강주임은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 뜬금없이 벌어지는 묘한 기싸움에 아랫사람을 끌어들이는 양반들이 수두룩한 세상이 아닌가. 이번에는 또 뭘까, 이 양반이면 견제 대상은 기부문장이나 쏭수석이다. 혹시 내가 모르는 일이 있다면 영관부문의 한수석일 수도 있지만 듣는 귀를 의식해보면 이 자리에 없는 한수석일 리는 없다. 전자의 둘 중 하나이거나 둘 전부일 것이다.


 "무슨 소리야, 아리가 도면 줬는데?"


 끼어드는 기부문장이다.


 '아, 부문장님이구나.'


 강주임은 트집 잡히는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는 제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견제 구도도 명확해졌으니 앞으로 살피기도 쉬워졌다. 기분 나쁜 오후가 되려나 했는데 오히려 운이 좋다. 그나저나 대놓고 부문장을 공격하고드는 수석을 눈 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살짝 흥미가 솟아난다.


 "아, 그렇습니까. 아유, 회의 자료에 없어서 몰랐습니다. 강주임이 반년을 하고도 이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송수석이 뭐가 죄송해. 강책임도 죄송할 거 없지. 죄송은 이책임이 해야지."

 "...예?"

 "강책임은 다 볼 줄 알잖아. 여기 일 모르는 거 한 사람 아냐? 내 그래서 도면은 이책임쪽으로 보내라 그랬지."

 "...아, 예."

 "이책임은 회의 자료도 안 보고 뭐 하는 사람이야? 지난번 사장님 보고 보니까 축베어링이 뭔지도 모르고 써놨던데."

 "..."

 "임박해서 강책임더러 싹 다 갈아달라 그랬잖아."

 "...예."

 "베어링 구분도 못하는 놈이 기획을 어떻게 해? 보고 부서 놈이 기본은 해야 될 거 아냐, 기본은. "

 "...그, 우리 이책임이 영업에서 뼈가 굵은..."

 "숫자는 왜 틀려, 그럼?"

 "...예?"

 "숫자도 싹 다 갈아엎었어."

 "재무에서 유미씨가 급히 해줬어. 말이 그렇지 내가, 응? 보고 30분 전에 재무 막내한테 가서 빌었다. 걔는 속으로 얼마나 욕을 욕을 했겠냐. 애가 착하더라."

 "아, ...예. 그... 영업 쪽 숫자가 ...리얼타임이라."

 "여기가 영업이야?"

 "아닙니다."

 "잘 하자."

 "옙."


 송수석이 일으킨 작은 사화는 본인의 대패로 끝이 났다. 기부문장 말대로다. 총괄 부서란 그런 것이다. 회사의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한다. 모든 일이 제 일인 부서다. 강주임만해도 시설, 안전, 심지어는 영업 일까지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로지 영업 일만 해온 이책임이 기부문장의 눈에 어찌 보일 지는 송수석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본인도 미덥지 못한 이책임을 한 명의 기획인으로 양성하고자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우선은 주무부처와 국회의원실부터 데리고 다니며 하나하나 가르치려 했건만 급격한 내부 변화로 이책임의 밑천이 삽시간에 드러나버린 것이다.


 강부문장은 송수석에게 많은 결정권을 위임했었다. 그 덕에 이책임의 허실 정도는 바르고 덮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기부문장이 오고부터는 이책임과 묶인 통에 오히려 강주임에게 잡아먹히게 생겼다. 거기에 기부문장과 한 통속인 쏭. 송수석은 최근 쏭과 얽힌 유쾌하지 않은 과거를 자주 떠올린다.


 그곳은 액세스에 비하면 큰 회사였다. 빡빡한 기조실 내에서 재무만큼 티오를 확보할 수 없었던 기획은 항상 티오가 적었다. 10년차 아래로는 사원으로도 보지 않는 고일대로 고인 물들의 연회장. 때마침 임신과 출산을 계획한 재무의 쏭선배 자리는 그가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대리 자리였다.


 91일. 모든 일에는 명분과 규칙이 필요하다. 특히 중요한 자리로의 복직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출산 후 91일 만에 돌아온 쏭은 하루가 늦은 탓으로 송에게 제 자리를 내주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90일 내로 복귀했다면 자리를 고수하고 재차 육아 휴직을 써 자연스럽게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테지만 연휴가 끼어 인사 쪽에서 계산 상의 작은 착오가 발생했던 것이다. 송수석은 자리에 없는 선배의 휴직 일수를 하루하루 헤아리며 단 하나의 자리를 꿰찼다. 기획에 티오가 없다면 같은 기조실인 재무로 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그 물이 그 물이다.


 하늘은 송의 편이었다. 때마침 정권이 바뀌며 기존 장들이 모두 지방 발령을 받은 탓에 쏭을 챙길 윗사람은 전부 증발하고 없었다. 강부문장과 송수석의 인연은 그때부터였다. 그 전 정권의 희생양이었던 강은 부산에서의 긴 근신을 마치고 기획조정실 산하 기획재무처의 장으로 부임했고, 쏭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송으로 채워졌다. 송과 쏭은 그렇게 공고히 갈라서서 각각 강과 기를 두둔하며 악연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송수석은 설마 새 기관에서까지 쏭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 좁다는 것을 하루하루 뼈에 새긴다.


 '야, 쏭이 너 잡으러 온다던데?'


 그 언젠가 용한이 형이 흘린 말이 왜 지금 떠오르는 것인지. 송수석은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애꿎은 휴대폰만 만지작거린다.


 '그 형 때문이여, 날더러 이딴 그지 같은 델 오라고, 응? 형은 개뿔, 웬수여 웬수.'



 "재희씨는 부산에 있었던가? 광주?"

 "저는 광줍니다. 선배는 부산이셨었나요?"

 "어어, 난 부산. 그때 대통령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어후, 진짜. 육휴 들어가기 전까지 현장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몸으로 개고생 했다는 거 아냐. 직장이 뭐라고, 애 떨어뜨려 놓고 죄 졌지 정말."

 "하아, 그쵸. 아련하네. 그게 뭐라고. 아련하네요."


 '달그락'


 "니가 민이구나?"


 두 어른의 대화를 세로로 가르며 멋들어진 드립커피를 한 잔 내주는 정책임이다.


 "너 알아? 티에프실 커피가 한국 최고라고 소문 다 났어."

 "어우, 정말요? 감사합니닷!"


 쏭의 귓가로 입을 가져다댄 정책임이 속삭인다.


 "이거 제가 직접 수입한 콩이거든요."


 쏭은 부리가 S자로 휜 예사롭지 않은 주전자를 들고는 곰살맞게 자리로 돌아가는 정책임이 제법 귀엽다. 언제부터인가 티에프실은 윗사람들이 모이는 카페가 되었다. 떠난 사장에게는 핵심이었던 티에프가 새 사장이 오고부터는 존재감이 없어졌다. 감사부문장은 그 틈을 타 티에프실에 자리를 잡고는 제 사람들을 불러 비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기획 쪽은 여자들이 다 귀여워. 그치?"

 "...예?"


 당황하는 감사부문장이다.


 "어머, 당황한거야 지금? 재희 너도 귀엽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감사부문장의 모습이 새롭다. 시리처럼 불쑥 튀어나오는 쏭의 마이페이스에는 모두가 휘말리고 만다. 정책임은 티에프 발령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신선한 인물의 등장에 신이 나있다. 둘째를 낳고 복직했다는 쏭이라는 인물은 어째서인지 보는 것 만으로 그의 마음속 응어리를 하나하나 풀어주는 것이다. 시원하게 뻗은 긴 다리와 강하게 자리 잡은 어깨가 멋있다. 정책임은 어려서부터 그런 멋진 몸을 갖고 싶었다.


 "나 재무에 있을 때부터 그랬었잖아. 쩌어기, 미리. 걔도 그때 기획 입사했었고."

 "아, 그러네요. 선배 재무 있을 때 미리씨가 입사했던가?"

 "그래, 그리고 그 이쁜 애. 준현인가?"

 "준현...씨요? 모르겠는데."

 "에휴, 하여간 너는 인사 있었으면서 애들한테 관심이 없냐. 그러니까 애들이 관두는 거야."

 "아, ...네. 뭐 그렇죠."

 

 쏭은 왼팔을 이마에 괴고 다리를 꼰 채로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도저히 생각이 안 난다는 듯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번갈아 공중에 파닥여본다.


"...아, 아아.... 생각날 것 같은데..., 아아."


 정책임은 그 모습이 이유 없이 유쾌해 웃음이 터지고 만다.


 '푸흡!' / "준우!"


 웃음이 터짐과 동시에 뜻밖의 이름이 공중에 퍼진다. 감사부문장과 정책임은 리액션을 망설이다 그저 쏭의 기다란 두 손가락을 바라보기로 했다.


 "준우야, 준우. 걔, 아이돌처럼 예쁘게 생긴 남자애. 시 깡촌에서 왔던 애. 기억 안 나? 왜 저 기획 미리랑..."


 코를 간질이던 성가신 먼지가 사라지듯 시원하게 떠오른 인적사항에 들떠 큰 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쏭은 급히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말을 멈춘다.


 "신... 준우요?"


 감사부문장은 생각났다는 듯 굽은 자세로 앉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두 손을 감싸쥐며 주무른다.


 "걔..., 성이 신이었나?"

 "네, 맞을 겁니다. 신준우씨. 미리씨 다음 기수."

 "그래, 걔. 으유, 난 또 뭐라고, 내가 못할 말 했나 했네. 왜... 그, ...그렇게 된 애 있잖아. 난 또 걔가 걘가... 싶어서. 아, 몰라. 너 때매 놀랐잖아. 에이씨, 정말, 사람 이상하네."

 "아. 죄송합니다. 그 건은 그쪽이랑은 상관없어요."


 쏭은 한시름 놨다는 듯이 커피를 한 잔 하고는 의외의 맛에 두 모금 더 들이킨다. 컵을 내려놓으려다 다시 한 모금 들이킨다.


 "어우 야, 어머, 이거 뭐야? 웬일이니? 무슨 맛이야, 이게? 새콤하니 맛있네?"

 "..."

 

 의외의 긴 정적에 감사부문장과 쏭이 정책임 쪽으로 고개를 틀자 그곳에는 준우의 이름이 여전히 귓가에 흩날리고 있는 초점 잃은 정책임이 어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모양새로 그저 정면을 응시하며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2020년 3월 17일 화요일 맑은 뒤 흐림


<감사부문 유부문장> 신준우, 신준우.

 그래. 어디서 봤다 했지. 신준우. 준우. 그 준우구나. 기재처 막내. 신준우. 그리고 강미리. 그때 그 둘이 기재처였다? 강짱돌이, 송보강이, 강미리, 신준우. 그리고 그 불쌍한 놈. 멤버 한 번 기가 막히네. 티에프로 빠진 게 강미리, 그놈이랑 끝까지 같이 있었던 게 신준우. 강짱돌, 신준우. 그놈이. 그 놈이었다?


<시관부문 쏭수석> 왜 하필 재희 앞이야.

 에이씨, 찝찝하게. 가만있어봐. 내가 뭐 못할 말 한 거 없지? 저 앙큼스런 놈 앞에서 괜히 옛날 얘기하다 기분만 더럽혔네. 여긴 무슨 거기 떨거지들 집합소야? 왜 여기 다 모여 있어? 조용히 좀 살아보려고 이직했더니 웬수에 미스터리에. 가지가지 한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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