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
190618_1일 차
공항에서
외국인이 많이 보이고 들린다. 유창한 영어로 서로 다른 인종이 대화를 나눈다. 체크인 시간이 안 되어서 대기 중인데, 앉은자리의 우측 대각선에 동양인 노신사와 서양인 청년이 무언가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귀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티 내고 싶진 않다. 그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몰래 듣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 들리니 들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할아버지의 영어가 꽤 유창하다. 멋지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한국에서는 어디가 좋았는지 등의 대화가 마치 청년이 귀국한 후 할머니가 난로 앞에서 물어볼 만한 이야기들이다. 예상 질문을 미리 들은 청년이 부디 할머니 앞에서 재밌게 이야기를 들려드렸으면 한다.
일찌감치 나와서 그런지 공항에서의 대기 시간이 길었다. 노신사와 청년 외에도 중동에서 온 낯선 이들이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는 모습까지 보고 나서 앞으로의 일정을 확인하였다. 그러던 차에 스쿠버 다이빙 일정을 변경하였다. 원래 목요일이었는데, 금요일로의 변경이다. 하루가 달리 현지 날씨가 바뀌니, 그나마 나은 금요일로 변경한 것이다. 괜찮은 선택이었음 한다.
수속을 밟고, 비행기 안에서 다시금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가는 것일까. 어제와 다른 나를 원했던 나는 오늘 아침에도 차라리 비행기를 취소할까 싶을 정도로 변덕이 심했고, 귀찮았으며, 나태 했다. 그런 내가 내일 아침에 게스트 하우스 2층 침대에서 눈을 뜨면 마음을 달리 먹을까? 실험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는데,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백수기간이 길어지고 있는 만큼 마음의 응어리나 답답함도 함께 커졌다. 쓰고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마저도 표현이 제한적이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응당 나의 역할이겠으나, 어느덧 최선의 노력의 기대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의 연속을 직면하게 되니 시도조차 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상황을 정의하고 제약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게 볼 때는 찰나일 테지만, 당장의 무기력과 권태로움에서는 벗어날 길이 없었다.
나하 공항이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일본인과의 짧은 대화를 끝으로 2시간 여 만에 나하공항 LCC 터미널에 도착했다. 습한 날씨가 제주도의 그것과 같았다. 구글 맵스로 미리 잡아 높은 숙소를 찾아, 공항에서 나하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잡아탔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버스 애플리케이션이 없어 답답했다. 이것이 해외여행의 묘미일까. 연결되지 않음에서 오는 자유로움이 즐겁다. 숙소에서 대충 짐을 놓고, 패밀리마트에서 오키나와 맥주인 오리온과 닭튀김을 샀다. 그 길로 곧장 나와 나하 시내 유일의 해변에 왔다. 오는 길은 무서웠다. 밤에도 한낮처럼 밝은 우리나라와 달리, 빛이라고는 자판기뿐이었다. 자판기가 정말 많아서 마치 가로등 같았다.
패밀리마트를 시작으로 노래 4곡을 들으니 해변에 도착했다. 출발 전에 책 속의 사진에서 본 것처럼 작고 귀여운 해변이다. 때론 이런 해변이 위로가 된다. 마치 동네 작은 공원이다. 많은 동네 사람들이 한 주의 시작을 바닷바람과 함께 하고 있다. 소녀들이 바닷물 첨벙첨벙하며 들떠있다. 나는 외롭지만 왠지 모르게 안심이다. 어두운 거리를 지나와서 그랬는지, 현실과 멀어져서인지 모르겠다. 어떤 쪽이 되었든 지금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내일 아침에 이곳은 어떤 모습일까?
숙소로 들어왔다. 20번 침대를 배정받았다. 오늘이 여행 시작이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원하는 답인 미래 청사진을 그릴 수 있을까? 마치 영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경험하려는 예술가의 마음과 같다. 목표를 새롭게 세우기 위한 마음가짐에도 영감이 필요할까. 나는 꿈꾸기엔 조금 늦은 나이일까. 베로니카가 죽기로 결심한 나이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희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