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웃어주지 않기로 했다> 출간 기념 연재
젊은 여성은 만만하다.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에게 친절한 태도를 요구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택시다. 여성이라면 택시를 타다 무례한 질문, 희롱성 발언, 난폭 운전 등 한 번쯤 기분 나빴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날도 타자마자 반말을 섞으며 하대하는 기사를 보고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뒷자리에 앉은 나를 백미러로 연신 힐끗 보며 옷차림과 자세에 대해 반말조로 훈수를 뒀다. 우리 아빠도 안 하 는 잔소리를 웬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에게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지만 소란을 일으키기 싫어 꾹 참았다. 하차할 때쯤 나는 택시기사에게 저쯤에서 세워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 말에 택시기사는 다짜고짜 왜 말을 기분 나쁘게 하냐며 공격적인 말투로 시비를 걸었다.
나는 분명 존댓말을 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말끝을 흐리지 않고 또박또박,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한 것이 아니꼬웠던 걸까. 결국 참고 있던 분노를 터뜨렸다. 존댓말로 했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당신도 반말하니까 나도 반말하겠다며 민원을 넣겠다고 강하게 대응했다. 신기하게도 방금까지 억압적인 말투로 공격성을 표출하던 그가 갑자기 꼬리를 내리며 자기는 재미있자고 한 말이라며 태도를 바꿨다. 툭툭 내뱉던 반말도 어느새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설마 젊은 여성이 강하게 대처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당신이 참아줄수록 그들은 모종의 용기를 낸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처음부터 참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을. 무례한 행동을 조용히 넘어가 줄 때마다 그는 ‘쟤는 만만해 보이니까 이참에 화풀이나 해야겠다. 어차피 반격하지도 못해’라는 생각으로 모종의 용기를 얻었다는 것을. 지하철 1호선에서 뜬금없이 욕을 하던 할아버지, 허락 없이 목욕탕에서 내 몸을 만지며 평가하던 중년 여성, 성희롱 발언을 한 직원을 감싸던 에이전시. 그들을 만난 이후로 나는 “당신이 하는 행동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라고 의사 표현을 정확히 하기 시작했다. 쉽진 않았다. 어떤 때는 고성이 오간 적도 있었고, 누군가는 예뻐서 그런 거 라며 자신의 무례한 행동은 사실 칭찬의 일부이니 네가 받아들이라고 했다. 무례함에 처음으로 강하게 대응했던 순간에는 온몸이 떨렸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잘했다 싶었다. 무례함에 지지 않는 내가, 나 자신의 감정을 우선 시하는 내가 고맙고 든든했다.
맥락 없이 무례한 사람들은 상대를 봐가며 시비를 건다. 생각해보니 아빠와 함께 다닐 때는 그 누구도 훈수를 두거나 시비를 건 적이 없었다. 남자는 부당한 처우를 받으면 참지 않고 반격하지만, 여자는 조용히 넘어간다는 것을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체로 쉽고 약해 보이는 상대를 타깃으로 삼았을 것이다.
여성들이 그들의 타깃이 되는 것은 신체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사회가 젊은 여성에게 요구하는 모종의 태도 때문이다. 사회는 유독 여성에게 모나지 않은 둥근 말투와 애교 등 유아 퇴행적인 행동을 바란다. 공격적이지 않을 것. 갈등을 일으키지 말 것. 말투는 사무적이어서는 안 되며 상냥할 것. 과묵하지 않을 것. 밝은 미소로 분위 기를 띄울 것. 그리고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난 여성은 ‘여자답지 못하고 감정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한눈에 보는 민원 빅데이터〉의 통계에 따르면, 2019년 기준 20대 여성의 민원 제기 건수는 11만 8,631건으로 20대 남성의 민원 건수인 17만 4,283건의 68 퍼센트 수준에 그쳤다. 이 데이터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불만을 호소하는데 덜 적극적임을 시사한다. 아마도 젊은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간혹 여성이 싹싹하지 못한 사무적인 말투로 대응하면 이를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당신 잘못이 아니라 상대가 여성을 동등하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긴장과 갈등은 대화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 여성의 애교로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불편하고 예민한 사람이 될 용기를 갖자
그들이 당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이유가 그러한 행동의 결과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일한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앞으로도 당신은 살면서 무례한 상황을 수차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시뮬레이션을 해보자. 약한 타깃만을 노리는 강약·약강 타입의 사람들을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쉬운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넘어가거나 불편하고 예민한 사람 취급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상대의 무례함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 반드시 해명을 요구하고, 선을 넘으면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경고하길 바란다. 목소리는 일부러라도 단호하게 내고 말끝은 흐리지 않는 편이 좋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무례한 사람들이 아닌 나 자신임을 기억하자.
당신이 먼저 나서서 상대의 무례함을 변명해줄 필요가 전혀 없다. 오로지 무례함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의무만 있을 뿐이다. 주말 예능에 나오는 남성 패널의 성차별 발언이 거슬리는가? 방송사 게시판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자. 남성 택시기사의 위협적인 행동이나 기분 나쁜 발언을 속으로 삭이지 말고 서울시 다산 콜센터에 불편 신고를 하자. 진상 민원인이나 블랙컨슈머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참으면 상대는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자신의 무례함을 합리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 말 없이 넘어가거나 침묵하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도록 하자. 또한 상대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한다면 최소한 당신도 그들에게 기분 나쁜 하루를 선사할 마지막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는 택시에서 겪었던 불쾌한 상황을 민원에 신고했다. 이번엔 교육 수준으로 넘어가지만 다음에 또 이런 민원이 들어오면 그때는 벌금과 같은 직접적인 처벌이 가능할 거라고 했다. 앞으로 그 무례한 택시기사는 다음번에 여성 승객에게 시비를 걸 때 적어도 한 번쯤 고민하지 않을까? 젊은 여성이라면 자신에게 져줄 것이라는 막돼먹은 생각을 조금은 바로잡지 않을까? 목소리를 내고 정면 대응할 때 세상은 조금씩 바뀐다. 내가 먼저 용기 내서 목소리를 내면 다음에 오는 사람이 목소리를 내기 쉬운 세상이 온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꺼이 ‘불편하고 예민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브런치 독자 여러분 덕에 <더 이상 웃어주지 않기로 했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여성들이 더욱 주체적이고 단단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생활밀착형 페미니즘 에세이입니다. 여성이라면 한번쯤 겪는 불편한 상황에 대한 대응법과, 더 멋진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실용적인 가이드를 제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겪었던 고통과 시행착오를 여러분은 조금이나마 덜 겪으셨으면 하는 마음에 책을 집필했습니다. 아마 많이 공감해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감 댓글과 좋아요로 응원해주셨던 모든 분께 다시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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