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유난히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있다면
사람들은 인생이 어려운 것은 다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찬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세우면 무적이 된다고 했지만, 여전히 나에게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은 허상처럼 느껴진다. 어떤 날의 나는 무대를 장악하는 비욘세처럼 임파워링되기도 하고, 또 다른 날의 나는 인생의 의미를 곱씹는 위기의 사춘기 소녀가 되기도 한다.
문득 먼지 쌓인 다이어리에서 툭 하고 떨어진 사진, 그 속에서 과거의 나와 마주했을 때의 기분. 얼마 전 스무 살 적 내 사진을 보고 묘한 감정을 느꼈다. 묘하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트렌드가 지난 화장법이 재밌기도 하고, 생기로 가득 찬 눈동자가 사랑스럽기도 하고, 곧 닥칠 고난에 대해 꿈에도 모른 채 천진난만한 얼굴에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동시에 내가 지나온 길목에 서 있는 그녀지만 어째서인지 타인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고, 과거의 나도 나의 일부인데 어쩐지 남 같은 기분이다. 20대 초반에 썼던 일기를 다시 읽어보면 그때의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처음 만났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나. 인턴십 면접에서 낙방하고 침울해하던 나.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스쳐 지나가며 던진 말에 고민하던 나. 당시 나는 생각이 많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며,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닐 일들로 걱정이 많았다.
과거의 나에게 해줄 말이 너무도 많다. 일단 그저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신은 너를 위한 계획을 준비해뒀다고.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네가 지금 하는 고민 중 80퍼센트는 곧 효력이 없어질 흑마법이라고. 설사 너를 죽이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 일들이 현실에 일어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어 있다고. 걱정과는 달리 밥벌이를 아주 잘하고 있으며 제법 괜찮은 미래를 살아갈 거라고. 원한다면 치즈 케이크를 두 조각씩 시켜 먹을 수 있다고. 불현듯 타국에서 살게 되고, 그곳에서 너에게 말을 건넨 그 사람에게 꼭 웃어주길 바란다. 당분간 행복하겠지만 곧 다가올 이별에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이후로 많이 성장할 테니. 아물지 않는 상처는 없고, 아물지 않더라도 전장의 흉터만큼 섹시한 건 또 없지.
무엇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길 바란다. ‘안정감’ 이라는 가치만큼 과대평가된 건 또 없다는 걸. 설사 망해서 바닥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생각보다 강한 사람일 테니 걱정하지 말 것. 파산하면 뭐 어때. 당분간 아보카도 토스트 대신 햇반과 김치만 먹고 살면 되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꼭 시도해보길. 애정 없는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기보다 네 내면의 목소리에 더 의지하길. 미련이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되, 계절의 변화와 맥주의 맛,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주름이 늘어가는 시간을 온전히 즐겼으면 한다.
어렸을 때만 해도 단단한 자존감을 세우지 못한 나를 책망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고민과 걱정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운 내가 있기에 어제보다 아주 조금 단단해진 내가 될 수 있었다는 걸. 자존감은 사실 별 거 아니고 스스로와 관계를 맺으며 ‘이 인간 말이야, 완전 무결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라고 평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예전 같았으면 비수를 꽂는 말을 들으면 잘 때까지 그 말을 곱씹었을 텐데, 지금은 코웃음 치며 지나치는 여유가 생겼다. 나라는 사람이 아주 대단하고 청렴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자란 것도 아니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젊은 나이에 벌써 자존감이 탄탄한 친구들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확신이 생기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스스로가 자존감이 낮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억지로 강해보이려고 할 필요도 없다. 자기 페이스대로 살다 보면 언젠가 스스로와 좀 더 편안한 관계를 맺게 되는 날이 온다. 반드시.
세상은 젊음의 값을 비싸게 치지만, 나는 10년 후, 그리고 앞으로의 20년 후 내 모습이 더 기대된다. 시간과 경험은 필연적으로 나를 단련시킬 테니까. 혹여 지금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있다면 언제나 이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비욘세 언니도 조금 울적해지는 날이 하루쯤은 있으리라는 것. 무엇보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여성들이 더욱 주체적이고 단단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생활밀착형 페미니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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