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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도쿄 생활의 끝자락에서

떠남은 언제나 익숙하지만, 이번만은 조금 다르다

by 두기노

카톡 프로필에 있는 디데이 계산기에 따르면, 오늘은 내가 도쿄에서 두 번째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1016일째 되는 날이다. 사십이 되기도 전에 외국계 보험사에서 임원 타이틀을 달고 9년 가까이 ‘상무님’ 호칭에 취해 거의 매일 전쟁터 같은 일상 속에서 번아웃 직전까지 버티다, 탈출하듯 한국을 떠나온 지도 벌써 3년이 되어간다. 표현이 빈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시간 참 빠르다”, “그래도 열심히 잘 살았다”는 진부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다시 도쿄로 복귀했던 건 오십을 넘긴 시점, 사회생활 27년 차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보험계리사로서의 전문성과 외국어로 소통이 가능한 점, 그리고 십수 년 전 일본 근무 경험이 더해져 운 좋게도 외국계 기업의 일본 지사에서 일할 기회를 다시 얻게 되었다. 한국에서 임원으로 누리던 지위와 대우를 내려놓는 대신, 더 여유로운 근무환경과 만족스러운 보상을 얻었다. 그 결과, 누구와 비교하거나 비교당할 필요 없이 오롯이 내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자발적 고독’의 시간을 선택했고, 지난 3년은 그야말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이제 나는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연말이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조그만 외국계 보험사에서 임원으로 복귀해 역할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게 8월 말이었고, 길지 않게 고민한 끝에 커리어의 마지막 불꽃을 한 번 더 태워보자고 마음먹었다. 단순히 직장을 옮기는 게 아니라, 삶의 터전이 될 나라를 옮기는 또 한 번의 큰 이동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기보다 늘 새로움을 좇고 변화를 갈망해 왔다. 이쪽에 서 있으면 저쪽으로 가고 싶고, 어렵게 건너가면 다시 돌아오고 싶은 — 그런 마음의 진자 운동 위에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것 같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밋밋한 건강식만 먹다 보면 자극적인 음식이 생각나듯, 지금의 직장에서는 책임이 덜한 만큼 주도할 수 있는 일도 적다 보니, 다시 한번 ‘지지고 볶는 현장’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 한국으로부터 제안을 받은 것이다.


사실 작년 연말에도 다른 회사로부터 제안을 받았지만, 그때는 직장보다 일본을 떠나는 아쉬움이 더 커서 정중히 고사했다. 하지만 이번엔 저울의 균형이 달랐다. 한때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나 자신을 보며, 어쩌면 ‘인간의 망각’이란 본능을 탓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속적으로 보자면 여전히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고, 윤동주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일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타입이 아니라 여러 번의 이직을 거치며 ‘떠남’과 ‘시작’의 감정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비교적 늦은 나이에 다시 얻은 일본에서의 근무 기회를 마무리하려 하니, 생각보다 감정이 복잡하다. 이제 나이를 생각하면 해외에서 또다시 일하기는 쉽지 않을 터라, 한국으로 돌아가는 설렘만큼이나 일본을 떠나는 아쉬움도 크다.


소소한 행복과 감사, 그리움을 선물해 준 수많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별것 아닌 일상 속에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감동받았던 기억들이, 잔잔한 물결처럼 다시 마음속으로 밀려온다.


다락방에 숨겨둔 쿠키 상자에서 몰래 과자를 꺼내 먹던 어린 시절처럼,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당분간은 일본에서 지내며 쌓였던 좋은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천천히 기록하려 한다. 그리고 때로는 마음 한구석에 남은 아쉬움과 답답했던 순간들도 조심스레 끄집어 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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