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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정리하며

도쿄 생활 마무리 기록

by 두기노

이번 삼연휴, 달리며 도쿄의 단풍 몇 군데를 둘러본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3년 남짓 이어온 도쿄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사는 작은 집에 미니멀하게 살아온 터라 짐이 많지 않을 줄 알았지만, 막상 정리를 시작하니 부칠 것도, 버릴 것도 생각보다 적지 않았다.


15년 전, 일본에서 4년간 근무를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회사에서 막판 업무를 마무리하고 있었고, 아내가 거의 혼자 이사와 정리 준비를 맡았다. 그때는 이런 일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신경을 쓰는 일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우체국 국제소포로 보낸 짐이 어느새 다섯 박스가 됐다. 내일 회사에서 돌아와 옷 몇 벌과 자잘한 물건을 조금 더 부치면, 한국으로 보낼 짐은 모두 끝난다. 모레 정해진 시간에 관리회사 직원이 입회해 집을 점검하고 나면, 당분간 일본 곳곳을 여행할 짐만 캐리어와 배낭에 나눠 담아 집을 떠나게 된다.


그동안 나를 품어준 이 소박한 집과도, 이제 작별이다.


욕실과 작은 부엌이 딸린 아홉 평 남짓한 이 작은 집에서, 지난 거의 3년을 참 행복하게 보냈다. 남서향이라 정오부터 오후 내내 커튼 너머로 햇빛이 스며들었고, 그 따사로움은 늘 하루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홑창이라 겨울이면 실내가 바깥 기온을 그대로 따라 추운 편이었지만, 좁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그고 나오면 그 알싸한 추위마저 금세 누그러지곤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름에는 또 뜻밖에 시원한 집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3년 가까이를 보냈는데, 이제 떠나려는 며칠 전에서야 처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청년이 옆집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다. 처음 입주했을 때는 건물 전체가 너무 조용해서, 혹시 이 다섯 층짜리 맨션에 나 혼자 사는 건 아닌가 의심했던 적도 있었다.


입주하면서 회사 지원금으로 마련했던 기본 가전과 침대, 그리고 쓸 만한 가구 몇 점은 한국 커뮤니티에 묶음으로 내놓았다. 상대방이 용달을 불러 직접 가져가야 했기에 최소한의 금액만 붙였더니, 하루도 되기 전에 모두 팔려 나갔다. 몇 가지는 무료 나눔을 했고, 남은 물건들 중 길이 30cm를 넘는 품목들은 구청에 신고해 유료 스티커를 붙여 버려야 한다. 내 경우엔 이런 식으로 처리해야 할 물건이 열두 개나 된다. 아직 뜯지 않은 식품과 소품들은 도보 20분 거리에 사는 아들에게 갖다 주었다.


이번 삼연휴를 포함해 거의 일주일 동안 ‘냉털’을 하며 음식물 쓰레기를 최소화하려고 애썼다. 아내와 통화할 때마다 그날의 냉털 성과를 영웅담처럼 늘어놓으며 며칠을 보냈다. 냉장고 안 음식은 거의 버리는 것 없이 꽤 잘 해냈지만, 쓰다 남은 식자재와 조미료는 생각보다 많았다.


‘일본은 미원이지’ 하고 사서 딱 한 번만 쓴 아지노모토를 시작으로, 후추 두 종류, 일본식 국간장, 간장 두 종류, 참치액젓, 미림, 폰즈, 타바스코 소스, 불닭볶음면 소스, 부침가루, 전분가루, 고추장과 쌈장 약간, 와사비, 마요네즈 등등… 나름 자제하며 최소한만 산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모아보니 꽤나 다양한 조미료들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내가 요리에 진심이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이제 오후에는 조리도구와 그릇, 용기류를 나눠 정리해 버릴 예정이다. 소장하고 싶었던 몇 권의 책은 이미 한국으로 보냈고, 남은 책들 가운데 일부는 도서관에 기증했다. 외국서적은 도서관에서 따로 심사해 소장 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 몇 권은 묶어서 폐기 처분할 생각이다.


무언가를 버리는 일은 늘 쓸쓸하면서도 후련하다. 애정이 깃들었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고 내놓을 때도 있고, 별 고민 없이 처분했다가 뒤늦게 아쉬움이 밀려올 때도 있다. 말 한마디 못하는 사소한 물건들이지만, 가능하다면 좋은 주인을 만나 오래 함께해 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 생각이 스치다 보니, 재활용될 수 있는 물건들은 최대한 깨끗하게 정리해 보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도쿄도 메구로구의 소박한 내 월셋집, 그리고 이 집에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내 모든 소유물들, 그동안 고마웠다.


함께 듣고 싶은 노래: 백아 <향기>

https://youtu.be/hky5sfHbnN8?si=ez6ONGyiD9mRkG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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