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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숙 Nov 18. 2019

너와 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과 계절 사이를 세세하게 느낀 순간이 있을까. 계절에 따라 바뀌는 공기조차 느낄 새 없이 시간은 흘렀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후, 시선은 눈길조차 안 주던 것들로 새롭게 바뀌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계절의 변화’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강제로, 어쩔 수 없이 '사계절 무사히 보내기’였는지도 모른다.



적막한 시골에서 나와 아이는 아침부터 새벽까지 한 몸처럼 붙어 있었다.

'내일은 무엇을 하며 보내지?’ 여기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산과 밭만 보이고, 덧붙여 나는 운전을 못 한다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었다.

새벽이 찾아오면 답답한 마음에 책을 집었다. 아무렇게나 펼쳐서 나온 글이‘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결정된다 –애니 딜러드-’였다.

맥주를 까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네가 하루만 애랑 단둘이 있어 봐라.” 어디서 본 듯한 좋은 명언조차 괜한 화풀이 대상이 될 줄이야.

똑같은 내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낮잠을 자는 아이를 보다가, 새벽에 비꼬는 마음으로 봤던 문장을 떠올렸다.

 우리의 인생이 결정된다고? 그렇다면 지지고 볶고 하더라도, 내 한 몸 희생해서 최선을 다해 같이 즐겨 보리라 다짐했다. 문을 힘껏 열었다. 갸름한 잔디 싹에서 싱그러운 푸른 내음이 느껴졌다.




나에게 봄이란, 아기가 없었을 때와 엄마가 되어 맞이한 봄으로 나뉜다. 꽃구경은 꼭 가야 했었다. 거기에 맞추어 하늘하늘한 옷도 사야 했고, 사진이 잘 나온다는 명소는 다 둘러보았다.

하지만 엄마인 지금은, 독박 육아에 찌들어 다 늘어난 티를 입고 있다.

마당에 새로 심은 뒤 시름시름 앓았던 벚꽃 나무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하나둘 피우기 시작한 꽃잎이 보였다. 아이와 함께 방울토마토 모종을 심고 키웠다. 관심을 주는 식물은 더 잘 자란다던데, 우리가 심은 얘들마다 얼마 살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는 본인이 직접 심었다는 것에 뿌듯한 모양이다.

그 모습에‘아 오늘도 한 건 했다’란 마음으로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었다.




여름

몸이 녹아 버릴 것만 같은 여름날이었다. 호스로 나무와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아이를 향해 신나게 장대비를 날려 주기도 했다.

그 이후 우리 집 마당에서 우산을 들고 있는 꼬마가 자주 보였을 거다. 그 앞에서 호스로 물을 뿌려대는 지친 엄마도 함께 말이다.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아침부터 몸은 탈 것 같고 아이는 자꾸 보채던, 기온 30도가 훌쩍 넘어가던 날이었다.       

    



가을

‘잠자리’하면 할 말이 많다. 서른 중반을 넘은 아줌마가 잠자리 잡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아이는 잡고 관찰하고 보내주며 하루를 보냈다. 만약 '우아하게 잠자리 잡기 대회’가 있다면, 부드러운 손목 스냅으로 기품 있게 잡아 1등을 했을 거다.

 “나 잠자리 잡아” 친구들이 전화해서 뭐하냐는 물음에 유행어처럼 답했다. 다들 대단하다, 너 같은 엄마 없다는 반응이었다.

정작 나는 허무함에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채워준 건, 계절에 따라 자연을 느끼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엄마, 낙엽 색깔이 꼭 예술 작품 같아.”

 또래보다 말이 느렸던 아들의 표현에 흠칫 놀랬다. 조바심 내지 않고, 곁에서 나 혼자 부지런히 떠든 결실이었을까. 우리의 어깨 위로 가을 햇볕이 비추고 있었다.

단풍잎을 줍고 뿌리고, 동물 모양으로 만들었다가, 발로 밟아 사각사각 소리를 들으며 보냈다.

아직도 아이는 길을 걷다 떨어진 낙엽을 주워, ‘예쁘다’를 연발하고는 내 가방에 쏙 넣는다. 몰래 버리고 싶지만, 감시하는 눈빛이 느껴져 바짝 마른 잎을 집까지 데려오곤 한다.




겨울

얼어버린 잔디 위를 늘 그렇듯 열심히 같이 뛰어다녔다. 바싹바싹 마른 강아지풀, 잎을 다 떨군 벚꽃 나무가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다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생기가 돌 수 있을까.

갑자기 눈이 내리던 날, 같이 누워서 데굴데굴 굴렀다. 안 하던 짓을 하게 만드는 그 힘, 순수한 아이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새로운 곳에 이사 와, 막막하고 자신이 없었다. 아이와 단둘의 시간이 힘겨웠다. 어떤 날은 연신 웃어댔고 또 다음날은 무기력에 빠져 허덕였다. 오롯이 나만의 문제이자 책임으로 느껴졌다. 아이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 말이다.



과연 한 사람과 밀착하여 바람과 햇빛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서로의 기운을 주고받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떼쓰는 아이를 보며 화를 못 참던 날, 잡초 뽑으며 서로 의리를 다진 날, 땡볕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는 내 모습에 허탈했던 날들. 모두 모여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의심과 자책보다는, 노력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조금의 용기가 생긴 것이다.

계절과 계절 사이의 따스한 볕, 바람이 스치는 소리, 풀 내음이 느껴진다. 그들은 자양분과 거름이 되어 엄마와 아이를 조금씩 자라게 한다.      



사계절을 보내며 우리는 더 끈끈해졌다. 구릿빛 목덜미, 자잘한 주근깨의 강력한 흔적도 얻었다.

그 흔적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성큼 다가온 너와 나의 봄. 살짝 두렵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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