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지구본을 보다 잠들었다. 그 지구본의 조명 스위치를 켰다. 찰깍. 따뜻한 갈색 빛이 동그란 지구를 감싸며 방 한구석을 은은하게 비췄다. 나의 여덟 살부터 스물아홉의 흔적이 침잠된 좁은 방, 여기서 밤을 보낸다.
'블랑' 맥주 한 캔을 땄다. 와 이게 뭐라고 미치게 좋지. 한 모금을 입에서 머금다 흘려보내고 e북을 열었다. 책은 무조건 종이책이라고 고집했었다. 빳빳한 종이의 감촉과 떫은 새 책 냄새, 표지의 색감을 좋아했다. 한 페이지 꾹꾹 눌러 접어 읽고,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은 가까이에 있는 펜으로 어지럽게 그어야 했다. 내 손길이 닿아 조금은 구겨지고 부드러워진 책. 종이책이어야만 한다.
그러한 내 책들은 중국으로 보낼 이삿짐에 모조리 다 보냈다. 출국이 무기한 연기된 지금, 내 책들은 어두컴컴한 퀴퀴한 냄새가 나는 어느 물류창고에 쌓여 있겠지. 캐리어 짐에 무게를 더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e북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 밤, 여느 날과 뭔가가 달랐다.
한동안 우울함이 바닥 아래 구멍을 파고 또 파서, 어디까지 내려갈지 모를 지경이었다. 코로나가 짜증 났고, 집이 월세로 바로 나간 것을 후회했다. 짐을 다 보내 캐리어 세 개만 덜렁 남은 결과도 막막했고, 친정엄마 집과 호텔을 왔다 갔다 하며 내 공간이 없음에 화가 났었다. 언제 출국할 수 있을지, 먼저 가야 할 남편은 괜찮을까, 아이 유치원은 어째야 할지. 그렇게 고민창만 열어 놓고 징징거리기만 했던 거다.
그런데 생뚱맞게 차가운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보는 이 순간, 흥이 올랐다. 와 이게 뭐라고 미치게 좋지. 두 번째로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우울의 바닥을 파더니 갑자기 좋아 미치겠다라...... 이런 감정의 폭 차이가 당황스럽지만 기념으로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 나 지금, 주원이 재우고 맥주 사 와서 책 읽으면서 음악 듣는데 와, 미치겠어 이게 뭐라고 너뮤, 좋지.. 이 순간이 왜 이렇게 감사하지; 사람이 집이 없어져 봐야 해.] 내일 출근 알람을 듣고 혼자 깰 남편이, 이 문자를 본다면 오히려 나를 더 걱정할지도 모르겠다. 얘, 확실히 쫌 이상한데.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지울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정말 이 시간이 고마웠으므로.
무엇 때문일까. 맥주 때문일까. 아님 책, 이어폰의 음악? 순식간에 와작와작 씹어 마신 자갈치 과자? 국제 짐 금지 품목이라 보내지 못하고 데려온 지구본, 그래. 얘가 뿜는 따스한 빛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쪼글쪼글한 마음이 풀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