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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숙 Sep 06. 2020

우리에게도 '바다 동굴'이 있었으면

<어느 멋진 날> 저자: 윤정미


 코로나와 장마가 겹친 여름,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해외에 있고 아이의 긴 방학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행을 가고 싶다, 떠나고 싶다’라는 간절한 바람이 마음속에서 끓고 있을 때, <어느 멋진 날> 그림책을 만났다. 표지 그림은 한참 동안 쳐다볼 만큼 아름다웠다. 거대한 바다 동굴과 빛나는 바다, 작은 배와 더 작은 소년 위로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다. 그림만으로, 무료했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이 일어났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섬마을이, 도시에 살던 소년에게는 따분하고 조용할 뿐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바다 동굴을 보러 가게 되면서, 이곳은 새롭고 멋진 섬으로 다가온다. 화려한 뿔을 가진 산호초뿔바다사슴과 함께 눈부신 바닷속을 구경하고, 등대 자리에 있던 길쭉한 곰을 만나기도 한다. 두 눈을 감았다가 뜨자, 사라졌던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보인다. 돌아가는 배에서 바라본 섬은 더 이상 잠자듯 지루한 세상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바다 동굴’이 있었으면 좋겠다. 소년이 섬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처럼. 메마른 일상 속에서 엉뚱하고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어쩌면 단숨에 고른 그림책 한 권이, 신비한 바다 동굴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을수록 묻혀 있던 그리운 추억이 툭 튀어나오니까 말이다. 이렇게 소환된 추억은 마음을 말랑하게 만든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느긋해진다.




 책의 주인공과 비슷하게 열 살쯤 되었을까. 그때 갔던 부산 다대포 바다가 떠올랐다. 근처에 살던 큰 고모부는, 지프차에 나와 동생을 태워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이 몰아치는 바닷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짜고 비린 시원한 바람을 다 마셔버릴 기세로 입을 쩍 벌렸다. 동생도 질세라 입을 더 크게 벌렸다. 철썩이는 파도와 요란한 갈매기 소리도, 바람과 함께 섞여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배를 두드리며 빵빵해졌다 웃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두 팔 벌린 소년의 뒷모습에서, 내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을 되찾았다.



<어느 멋진 날>의 한 장면, 그리다보니 바다가 더 그리워졌다.





 글을 쓰는 동안,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비록 빨래 건조대의 수건을 말리는 선풍기 소리일지라도. 날개가 회전할 때마다 저마다 펄럭이는 수건을 보고 있으면, 이 밤도 어느 멋진 날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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