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명상을 하면 저절로 일어나는 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해본 적 있는가?
고통을 멈추게 하려면 이 질문의 답을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면 에고의 놀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의 몸이 나의 몸이 아닌 것이 된다. 이 말은 우리는 우리의 몸이 나라고 착각하고 딱 붙어서 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리다.
고집멸도. 부처님이 가르친 첫 번째 설법이다. 집착을 멈추면 고통이 사라진다.
집착은 내가, 이 몸뚱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주가 만들어놓은 이 판을 내가 어떻게 바꾸어놓을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부정하려는 것에서부터 고통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모든 현상을 집착 없이 받아들이면 그 고통은 사라진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은, 나는 살아있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내가 잠을 자고 있어도 잠들지 않는다.
꿈속에서는 나의 모습이 계속 바뀐다. 동물이 되기도 하고 성별이 바뀌기도 하며 심지어는 상황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꿈속에서는 그것이 진짜라고 생생히 느낀다. 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그것이 다 허상이라는 것을 안다.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깨어있는 꿈을 꿀뿐이다. 인간이라는 옷을 입고서.
살아있는 의식으로 살면 나는 나를 지켜보는 관찰자가 된다. 생각과 감정을 지켜보는 그 누구가 된다.
그러자 나는 에고의 꼭두각시가 아닌 관찰자가 되었다.
최근에 나는 성추행을 당했다. 운동을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나를 촬영한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감정에 휘둘렸을 것이다. 특히 성적인 것에 너무 민감한 나는 이성적인 판단을 못했을 나인데, 그 남자를 그 자리에서 잡아서 동영상을 삭제하게 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유유히 사라지는 방향을 포착해서 보안팀에 CCTV까지 확보를 했다. 나는 이 사람이 중국 소셜미디어에 올렸을지도 모르는 부분, 그리고 이렇게 과감하게 사람을 앞에다 두고 동영상을 촬영한 부분을 너무 괘씸하게 생각해서 경찰에 넘기기로 했다.
그날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았고, 분노했지만 나는 감정이 머물러 있을 공간을 조금 더 크게 만들어 주고 함께 있어주었다. 마치 5살짜리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나는 응급실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한 번은 나의 파트너가 식중독으로 탈수증상이 너무 심해서 거의 기절직전까지 갔었는데 나는 그를 데리고 차분하게 응급실에 다녀왔다. 나를 감정적으로 보지 않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지혜를 주었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내가 응급실에 갔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몇 번이나 이 상황이 응급실을 가야 할 상황인지, 참고 넘길 수 있는 상황인지를 물었고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안전을 위해 응급실을 가야 한다는 대답이었다. 덕분에 나는 폐렴에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그 밖에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통제하지 않고,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가 되었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노력할수록, 나의 괴로움이 더해졌다. 내가 그것을 통제하고 싶다고 해도 상황이 바뀌지가 않으니까.
나의 매일 명상은 나와 내면아이를 만나게 해 주었고, 현재도 스스로 치료하고 있으며 저절로 위빠사나가 되는 바른 깨달음과 지혜를 주셨다.
명상이라고 각 잡고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잘 살고 있는 것, 매 순간을 명상이라고 받아들이며 살면 된다.
그러니 모두가 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다.
나의 의식은 올해 초에 다르고, 작년 하반기에 다르며 재작년에 다른 사람이다. 너무 다른 사람.
고통은 나를 성장시킨다. 아이러니하지만 고통밖에는 나를 성장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 겪는 고통은 내가 커지고 있는 것이라고 강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