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8개월의 대일협상> 유의상 저
한일관계를 다루는 글을 (글이라기에는 너무 표피적이어서 부끄럽지만) 써야 하는 상황에 주기적으로 놓이곤 한다. 그 때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이 국교정상화에 합의하면서 맺은 '한일청구권협정'이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청구권협정이 2021년 '지금, 여기'의 한일관계를 규율하는 문서라고 부를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한일 간 최대 쟁점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피해 배상 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뿌리에는 청구권협정에 관한 양측의 해석차와 협정의 유효성 문제, 협정 체결 당시의 논의 과정이 고스란히 있다.
<13년 8개월의 대일협상>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일찌감치 이 책을 알게 되었더라면 업무에 도움이 되었을텐데, 라는 뒤늦은 후회였다. 문고판 크기 판형에 160쪽으로 얇은 책이지만, 한일회담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핵심적인 역사적 사실을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이 다루는 '팩트'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이후 한일회담이 시작된 과정, 이승만-장면-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7차례 동안 전개된 한일회담 경과, 한일청구권협정과 재일한국인법적지위 관련 협정 등 한일 협정의 내용과 쟁점. 많은 기사와 자료들을 통해 이미 익숙한 내용들이긴 했지만, 책이라는 잘 정리된 형태의 지식으로 다시 만나는 것은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그런데 이 얇은 책에서 얻은 '부가가치'는 사실 간단명료한 팩트 정리보다도 저자의 '관점'이었다. 책의 부제인 '한일회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힌트가 있다. 일본 업무를 상당기간 담당한 전직 외교관인 저자는 단지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관점을 보태는데, 관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흥미로웠다.
특히 당시 한일 간 교섭 과정에 임했던 한국 정부, 다시 말하면 저자의 선배 외교관들의 사정을 이해해보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이를테면,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꿈꿀 수 없던 시절, 일본에서 회담이 13년 동안 7차례나 진행되는 동안 회담 대표단이 본부와의 교신 과정에 어려움을 겪었고, 빠듯한 비용으로 체류 환경도 열악했을 것이라면서, "한일협정은 한국이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통해 도출해 낸 결과물"이라고 적는 부분이 그렇다. 한국 정부가 열악한 위치를 극복하기 위해 협상 지렛대로 '평화선'을 활용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책에 '팔이 안으로 굽는' 식의 관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정부가 개인청구권 행사를 유보하고, 국가 간 일괄타결 방식의 청구권 문제 해결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일본의 증거인멸, 한국전쟁으로 인한 증거 보존 불충분 등 때문이라고 지적하는데, 백프로 수긍이 가지는 않지만 일본이라면 식민지배 피해라는 인도적 차원의 문제에 대해 '법적 증거 제시'를 우선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한일회담은 처음부터 미국이 주도한 전후 질서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체제의 '하부구조'였고, 그로 인해 처음부터 제약이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따라서 한국은 그만큼 독자적으로 교섭을 진행시켜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제한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샌프란 체제 설계자인 미국은 일본의 부흥을 원하였으며, 한국이 일본에 대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국이 식민지 지배 배상요구가 아니라 반환 청구 등 사법적 성격의 청구권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한국은 샌프란 강화조약 당사국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샌프란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일본을 상대로 식민지배 배상을 강하게 요구한 이승만 정부의 목소리는 미국의 입장과도 충돌하면서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미국이 '차선책'으로 대일강화조약 4조에 따라 한일이 '양자협의'를 열어 문제를 해결하도록 주선하면서 한일회담이 시작됐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또한 설령 대일강화조약 당사국 지위를 얻었더라도, '하부구조'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일협정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국이 샌프란 대일강화조약의 서명국이 되지 못하고 일본과의 양자협의, 즉 한일회담을 통해 현안들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배상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이 대일강화조약의 당사국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간 주장해온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대일강화조약은 14조에 일본이 최소한의 전쟁 피해만을 배상토록 규정하였을 뿐,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은 전혀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p122)
저자가 한일회담을 둘러싼 제약들을 언급하는 부분이 누군가에겐 '변명'으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열악한 현실' 뒤에 숨어서 냉정한 역사적 평가를 외면하려는 태도로 비칠 수도 있겠다 싶다. 나 역시도 역사를 읽을 때마다 '만약에 이랬더라면' 혹은 '~ 대신 ~ 했어야 마땅했다' 는 가정법과 당위성의 논리를 들이밀고픈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샌프란 체제는 전후 자유진영의 세계 질서를 주도하고, 특히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이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의 기획이었다. 1952~1965년 당시 한국을 둘러싼 엄연한 현실이었던 이같은 구조를 외면하고는 역사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지 않을까. 그런 구조 하에서도 행위의 능동성은 작동할 수 있지만, 구조를 떠나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몇 달전, 평소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한 외교관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몇십년 간 한국 외교를 지배할 키워드는 '기승전 - 미중갈등' 이라고. 북핵, 한반도 평화 등도 미중 대결 구도에 뒤따라서 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이 뭘 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겠다. 너무 결정론적이니까'라고 다소 삐딱하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그가 되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가 움직일 공간이 커지나요?"
우문현답이었다. 미중 전략 경쟁이라는 판도를 모른 체하고서는 외교나 경제나 나아갈 방향을 그릴 수 없는 것은,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특히 강대국에 의해 운명이 좌우되어온 한국은 돌아가는 바깥 사정을 먼저 잘 살피고, 그 다음 설 땅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시험 문제 풀이가 그렇듯이, 주어진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할 때 조금이나마 해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