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다. 겨울치고는 아침 창이 유난히 밝다. 천천히 일어나 창을 내다본다. 눈이 하얗게 쌓였다. 마음이 설렌다. 오늘 같은 날은 친구들을 모아 작대기와 올무를 들고 앞산에 올라가 토끼나 꿩을 잡기에 알맞은 날이다. 간밤에 눈이 소복이 쌓였고 아침에는 볕이 좋고 바람이 없어 눈 위에 들짐승이 발자국을 남기기에 맞춤이고 눈 때문에 먹이를 쉬이 구할 수 없어 마을 근처까지 내려올 게 틀림없다. 눈 위에 ‘싸이나콩’이라도 몇 알씩 흩뿌려 두면 어쩌면 돌아오는 길에 꿩 몇 마리 주워올 수 있을 것이다.(*메주콩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 싸이나라는 살충제를 넣은 콩)
운이 좋아 토끼나 두어 마리 잡으면 좋겠다. 그러면 해가 기울쯤 어머니께 토끼탕을 끓여 달래서 밤새 뻥을 치면서 막걸리랑 곁들여 먹고, 동네 친구들과 진탕 놀 수 있을 터였다. ‘하, 정말지 오늘은 사냥을 가야지’ 그는 들뜬 기분으로 기운차게 드르륵 방문을 연다. 그때 어떤 예쁘장한 할머니가 부엌 쪽에서 나온다. 그를 보며 웃는다.
“여보, 오늘은 어쩐 일로 혼자서 일어나셨네요?”
그는 잠시 멈추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디선가 본 듯 낯이 익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
났다는 듯이 웃는다. ‘어제 마신 술이 덜 깼는가. 마누라 얼굴도 깜빡하고 사네? 흐흐’ 혼자 말을 하고는 물이라도 한잔 마실 요량으로 부엌 쪽으로 경쾌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 순간 그의 무릎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고 발이 공중에서 잠시 맴을 돈다. 그는 잠시 당황하다 또 생각한다. ‘어젯밤에 너무 뻥 방에 오래 앉아있었나? 우째 무릎에 힘이 안 들어가지?’ 그는 애써 이유를 갖다 붙인다.
마누라가 떠주는 물을 마시고 청국장과 말캉한 계란찜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잡곡밥에 넣고 질축하게 비빈다. 한 입 떠먹으니 꿀맛이다. ‘역시 이 맛이야.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 우리 마누라가 해주는 밥’
배가 봉긋하게 올라오도록 밥 한 공기를 다 비운다. 그는 사실 입이 단 것에 좀 놀랜다. 농한기인 겨울이면 뻥 방에서 친구들과 막걸리와 화투로 밤새 놀고, 아침이면 입이 깔깔하여 도무지 밥맛이 없었는데 오늘은 참 별라다고 느낀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일어난다. 마누라가 갑자기 놀라며 천천히 움직이라고 안 하던 잔소리를 한다.
‘저 여자가 미쳤나 왜 멀쩡한 남편한테 천천히 움직이라고 아침 댓바람부터 잔소리여?’
마누라의 성가신 잔소리를 뒤로하고 옷방으로 가서 눈밭을 뒹굴 솜바지를 찾는다. 마누라가
급히 뒤따라와 양치와 세수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냥을 나갈 생각에 씻는 것도 깜빡
했나보다고 생각하고 대충 씻는다. 오늘따라 자꾸 물이 질질 흘러서 웃옷을 적셔서 친친하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불쑥 화가 치민다. 대충 얼굴에 물만 묻히고 이는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욕실을 나와 다시 옷방으로 오니 마누라가 로션을 손바닥에 묻혀와서 그의 얼굴에 문지른다.
‘오늘 이 여자가 왜 이렇게 사람을 성가시게 혀?’
그는 그녀에게 내 일에 참견 좀 그만하라고 야멸차게 나무란다. 그는 다시 솜바지를 찾는다. 한눈에 솜바지가 보이질 않는다.
‘어제도 입었는데 어디 다 뒀지?’
그는 해가 높이 떠서 눈이 녹을까 봐 조바심을 친다. 마누라는 기모 양복바지와 털 스웨터를 꺼내 그에게 입으란다. 그는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꼬나본다. 그의 마누라는 참견을 싫어하는 그의 성질머리가 기어코 나오는가 싶어서 움찔한다. 그는 냅다 소리를 지른다.
“이 여자가 오늘 왜 이래? 눈 와서 친구들이랑 토끼 잡으러 산에 갈 건데 우짠 신사 바지여?”
그녀는 말문이 막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그녀의 눈에는 어쩐지 눈물이 맺힌다. 그는 영문을 몰라 눈만 껌벅이다 딴전을 피운다. 그때 초인종이 울린다. 그녀는 급히 그에게 옷을 입힌다. 그는 거부할 새도 없이 엉거주춤 옷이 입혀진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나가 운동화를 신킨다. 문 앞에는 아주머니 둘이 서 있다가 그를 보고 반색을 한다. “아휴, 어르신, 오늘도 멋쟁이 옷 입으셨네요? 오늘도 저희랑 재밌게 놀아요”
“어르신?”
그는 어리둥절하다.
“어서 차에 타세요. 조심, 조심”
“거, 누구시더라? 나 오늘 친구들이랑 토끼 사냥 갈 건데유?”
“아휴, 저희랑 같이 가세요. 저희가 잘 모시고 갈께요”
그의 마누라는 엷은 미소를 짓고 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고 그는 얼결에 “행복어르신주간보호센터”라고 씌여진 하얀색 모닝 뒷좌석에 앉혀져 실려 간다.
앞산은 흰 눈으로 빛이 나고 그는 몸을 틀어 뒷 창으로 자꾸만 멀어지는 동네 앞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냥을 가자면 몸이 날랜 창식이랑 필우를 데리고 가야 뭐라도 한 마리 잡을 텐데. 이 차는 왜 자꾸 나를 읍내 쪽으로 가능 겨? 오늘이 며칠이더라? 안성 장날이감? 우째 길이 한적하네. 다덜 새벽밥 먹고 장에덜 갔는감?’
그는 왠지 속이 답답하고 자꾸만 조바심이 난다. 앞산은 자꾸 멀어지고 눈은 자꾸만 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