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면서 듣게 된 어느 효녀의 고백
반찬투정이 효심으로 변하는 마법
우리는 주로 저녁 산책을 즐긴다. 이른 아침 목청 좋은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산책하면 더 끝내주겠지만, 몇 차례 시도 끝에 시간에 쫓겨 서둘러야 하는 아침보다 여유로운 저녁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산책길에는 수다가 따라와야 먼 길도 가까운 것처럼 걸을 수 있다. 이번 수다의 주제는 학교 급식으로 시작됐다.
"세상 참 좋아지긴 했어!
우리 때 학교급식을 상상이나 해봤나 뭐!
막내 급식 메뉴를 보다가 입이 쩍 벌어졌지 뭐야"
가정통신문을 확인해 달라는 문자를 받고 학교 앱을 열어보는데 오늘의 식단이 눈에 들어왔다. 수수밥, 소고기 미역국, 돼지갈비찜, 숙주당근무침, 김부각, 포기김치까지 영양이 꽉 들어찬 1식 5찬 에다가 후식으로 미니케이크까지 적혀 있었다. 진수성찬급 차림에 놀라기도 했고 우리가 챙기지 못한 막내의 영양을 나라에서 챙겨주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도 들었다. 급식 이야기로 시작된 산책길 수다는 시간을 되돌려 우리 부부의 학창 시절 점심시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난 우리 엄마가 만들어주는 도시락 반찬이 정해져 있었어.
감자채 볶음, 김치볶음, 계란말이, 진미채들이 돌아가며 반찬통을 채웠고, 신 김치가 약방의 감초처럼 늘 빠지지 않았었지. 가끔 실수로 김치 국물이 가방에 스며들기도 했지만, 그 시절 내가 학교에 다녔던 이유는 친구들과의 점심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
"2교시가 끝나면 도시락의 절반을 욱여넣고 점심시간 시작과 동시에 나머지 빈 그릇에 친구들의 반찬을 하나씩 동냥한 다음 흔들어 먹으면 아! 이게 행복이구나 했었지"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공원에 도착했고, 아내도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렸다.
"우리(4남매)는 김치볶음, 뱅어포, 진미채, 김치였어.
아침 밥상을 물리기 전에 엄마가 도시락 반찬통을 주면서 너희들 먹고 싶은 거 담으라고 했는데 늘 똑같은 반찬이 싫었지만 반찬투정은 부지런한 부모님 앞에서 엄두도 못 냈었지"
아내는 용돈을 털어 하굣길 커다란 스모그햄을 샀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춘기 소녀였지만, 새벽부터 밭일하고 4남매 아침과 도시락까지 챙겨야 했던 엄마의 수고를 모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밭 매러 간사이 햄을 구워 도시락 반찬통에 담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엄마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 일은 지금도 장모님의 기억 속에 아내가 지극히 효심 깊은 딸로 남아있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저장되어 있다.
"이서방! 얘가 학교 다닐때 새벽같이 일어나 제 도시락 반찬은 직접 준비했던 딸이여"
산책은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관찰하며 걷는 것도 좋고, 함께 걷는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도 좋다. 뜻밖의 수확을 얻은 산책길에서 아내의 반찬투정이 효심으로 변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고, 나는 흐뭇한 전설을 귀담아 두었다가 블로그에 내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