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째 아이가 태어났다. 주변에서는 '능력 있네 능력 있어'라며 추켜세웠지만, 아내와 나는 세 아이를 키운다기보다 그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는 게 더 정확했다. 철들기엔 이른 나이, 서른도 안된 나이에 결혼한 우리는 엄마, 아빠로 서투른 처음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가족 의. 식. 주를, 아내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육아를 맡았다. 나는 '의'와 '주'보다 '식'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집 두 딸은 내 음식 사랑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식'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반면, 아들은 엄마를 닮아 음식 선택 기준이 신중한 녀석이다. 아버지 말씀 중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입속으로 밥 들어가는 모습이 제일 보기 좋다 " 하셨다. 가족 모두가 만족하는 식당을 찾으면 봄 소풍 보물 찾기에 성공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간절해진다.
내 생에 가장 중요한 일은 가족들 잘 먹이는 것으로, 단순히 양과 질을 넘어 정서를 채우는 일이었다. 함께 식사하면서 아이들 학교에서 벌어진 친구 이야기, 선생님 별명, 미래에 펼쳐질 우리 모습에 대해 수다를 떨다 보면 주말이 후딱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팬데믹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족과 외식하는 일상이 무너지고, 어머니까지 잃는 슬픔이 우리를 힘들게 했다. 게다가 가족(5명)이 식당에서 겪은 '입장금지' 경험은 외식 문화를 식탁 문화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4인초과 인원은 식당에 갈 때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챙겨야 했다. 문제는 가족증명을 해도 손님들이 오해하고 신고한다며, 다섯 명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고를 받은 식당이 장사를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을 돌려세워야 했다. 세 아이 가정은 뭐든 다 해줄 것처럼 하더니 혜택은커녕 천덕꾸러기로 내몰린 꼴이 됐다.
팬데믹 수모를 겪은 후 우리는 외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 집에서 편안한 고무줄 바지 입고 각자 취향에 맞는 음식을 준비한 다음 식탁에서 회식을 즐겼다. 연말 가족 송년회도 집에서 했는데 연말 식당 찾는 곤욕이 사라지연서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무업보다 음식 취향이 확실한 아들과 적게 먹는 아내, 요리를 좋아하는 두 딸을 위해 메뉴를 다양하게 준비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저이다. 국가에서 불러주는 접대용 능력자를 버리고 가족을 위한 진정한 '능력자'로서의 면모를 발휘한 것이다.
처음 가족송년회는 음식에 집중했다. 외식 비용에 버금가는 예산을 털었는데 가족들의 반응은 차라리 나가서 먹는 게 좋겠다며 '가성비 제로'라는 혹독한 평을 남겼다. 이듬해 부타는 음식을 넘어, 재미와 추억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크리스마스와 송년회를 위한 쿠키 만들기, 누가 받게 될지 모르는 선물을 각자 준비하고 제비를 뽑아 나누기, 기억에 남는 1년과 내년 소망 인터뷰 촬영 하기를 시도했는데 반응은 굉장했다. 이후 가족송년회는 매년 풍성해졌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송년회에서 나눴던 소망이 이듬해에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단순히 마음속바람이 아니라, 가족 앞에서 목표와 희망을 말하면서 실현된 결과 아닐까. 가족의 소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서로가 보내는 보이지 않는 응원의 힘이 있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을까?
송년회를 마치고 찍는 가족사진 속에 우리가 함께 하는 소소한 일상과 한해 한해 성장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먼 훗날 사진을 보여 그날로 타임머신을 타고 식탁에 모일 수 있도록 매년 기록하는 중이다. 매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자세로 가족사진을 남기겠다는 다짐은, 서로의 소중함을 잊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도 담겨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바라보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가족과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얼마나 큰 가치를 주는지 깨달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 셋 '공갈 능력자'가 아닌 진정한 '능력자'로서 나와 가족의 행복을 지켜낸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