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의실, '헤어드라이어'의 산재신청

당신의 비밀의 숲 따위는 궁금하지 않아_식사 중 열람 주의

by 배바꿈

나는 원래 청담동 고급 살롱에서 엘레강스한 사모님의 머릿결을 찰랑이게 만들어야 했을 고귀한 몸이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내 신세는 습기와 수컷 향기(?)가 가득한 스포츠센터 남자 탈의실 벽에 매달려 있다.


나의 하루가 얼마나 악몽 같은 날인지 내 머리맡에 붙어 있는 주의사항이면 충분히 짐작 갈 것이다.

[주의사항: 머리손질 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마세요]

단언컨대, 이 탈의실에서 저 문구보다 완벽하게 무시당하는 존재는 없다. 내 눈에는 뚜렷한데 이들에게는 관심 없는 낙서쯤 되는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집과 직장만 오가다 처음으로 스포츠센터 문을 두드린 이 과장이 주의사항을 유심히 살폈다는 것이다. 부디 장면1,2,3을 읽고 그 초심이 계속 이어지길 바랐다.


장면 1. 발가락 사이의 폭풍

"철퍽, 철퍽." 물에 젖은 발걸음 소리가 다가온다. 그는 거울 앞 평상에 '쩍벌' 자세로 앉더니, 한쪽 다리를 턱 하니 올려놓는다. 불안하다. 설마...

"위이이잉-!" 나를 집어 들어 자신의 발가락 사이로 가져간다. 맙소사. 내 뜨거운 바람이 그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발가락 사이, 그 습진 가득한 계곡을 강타한다.

'아저씨, 제발! 내 흡입구로 무좀균이 빨려 들어오는 것 같다고요! 거긴 아저씨 수건으로 닦으라고요!'

그는 시원하다는 듯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그 꼬릿 한 냄새가 열풍을 타고 내 코일 깊숙이 박힌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더 뜨거워진다. 이건 열받아서 내는 열기다.


장면 2. 인간 자동세차기

저기 또 다른 빌런이 나타났다. 수건은 장식품인지, 샤워 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 그대로 내 앞에 선다.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리기 시작한다. 목, 어깨, 가슴, 배...

'이봐, 나는 '헤어드라이어'지 전신 건조기가 아니거든. 그 넓은 등판을 나로 다 말리려면 전기요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알기나 해?'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지지도 않나 보다. 그는 자동세차기에 들어간 자동차처럼 느긋하게 온몸을 회전시키며 나를 혹사한다. 내 모터가 과열되어 타는 냄새가 날 지경이다.


장면 3. 금지된 숲의 탐험가

가장 최악의 순간은 지금부터다. 머리를 말리던 자가 갑자기 나를 아래로, 더 아래로 내린다.

'잠깐만, 거기는 머리가 아니잖아! 위치가 너무 내려갔잖아!'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타구니 부근, '비밀의 숲'으로 내 주둥이를 들이민다.

"위이잉... (덜덜덜)"

나는 공포에 질려 진동한다.

'거긴 털은 털인데, 내가 담당하는 구역이 아니란 말이다! 왜 내가 당신의 은밀한 곳까지 습도관리를 해 줘야 하는 건데?'

그뿐인가. 어떤 자는 아예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 두 계곡 사이로 내 주둥이를 조준한다. (더 이상의 자세한 묘사는 생략한다. 나의 고결한 사물권 보호를 위해.) 그들이 나를 들고 기이한 요가 자세를 취할 때마다, 나는 원치 않는 해부학 실습을 하게 된다.

'제발 부탁인데, 너희들 엉덩이 골짜기는 수건으로 해결해라. 내 바람은 그렇게 쓰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밤 10시, 마감 시간이 되고 탈의실 불이 꺼진다.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히며 축 늘어진다. 내 송풍구 앞쪽 플라스틱은 하도 이상한 곳(?)에 닿아서 누렇게 변색됐고, 흡입구에는 정체불명의 꼬불꼬불한 털들이 잔뜩 끼어 있다. 내일 아침 전원이 켜지면, 가장 먼저 산재(원치 않는 인체탐험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신청서를 작성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내일은 제발, 내 본분인 '두피 위의 머리카락'만 만날 수 있기를. 발가락 무좀은 피부과에 양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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