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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수빈이 할머니

할머니 아프지 마세요.

by 예담


이 소설은 허구이며, 문학가를 꿈꾸는 중학교1학년 학생이 반년에 걸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골몰한 결과물입니다.

탈북을 주제로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지만 북한의 또래들에 대한 정보를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갈등을 극복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퇴고를 도우면서 읽어본 결과, 감동과 재미가 있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아이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느새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요원하게만 느껴졌던 따뜻한 봄이 왔다. 살짝 내리쬐는 햇빛의 따뜻함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학교에 와서 아이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1교시를 준비하는데 수빈이 말을 걸었다.

" 오늘 50미터 달리기 하잖아. 너 연습했어? "


수빈이 물병을 챙기더니 내 팔짱을 꼈다.


" 그동안 선생님 아프셨다가 다시 오셨잖아. 아, 미달되면 안 되는데. "


가슴이 쿵쿵 뛰었다. 체육이라니. 50미터 달리기? 내내 군사훈련만 받은 내게 체육은 식은 죽 먹기였다.

훈련이 아닌 그냥 달리기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학교운동장은 지난번에 슬쩍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몰려 이야기를 하거나 공놀이를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알록달록 예쁜 페인트로 칠해진 체육관이 있고 기구들도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 삭막한 모래로만 덮였던 북에서의 운동장을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눈을 끔벅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빈이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운동장에 섰다. 체육 선생님은 여자와 남자를 나누어 달리기를 시켰다. 50미터였는데 여러 가지 훈련만 받은 나에게 50미터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구령에 맞추어 뛰는 게 익숙하여 혼자 앞서 나가도 되는 것인가 고민을 했을 뿐이다.


" 어떡해. 너무 떨려. "


수빈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난 전혀 긴장되지 않았는데 수빈이 옆에서 너무 호들갑을 떠니 정신이 사나웠다. 하지만 그런 수빈이 싫지 않았다. 차례가 되었다. 모두가 나에게 집중했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긴장감이 밀려온다. 길고 긴 운동장을 보니 괜히 마른침이 삼켜지기도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뛰고 싶어서 숨을 크게 내쉬며 골랐다.


누구보다 빠르고 멋지게 뛸 것이다. 내가 약한 애가 아니란 걸 눈앞에서 보여주고 싶다는 오기가 솟았다. 호각이 울리자 나는 언제나 그렇듯 높이 날아올랐다. 아이들의 시선 속에서 달린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모두가 나에게만 집중한다고 생각하니 처음 느껴보는 설렘이 가득 차올랐다.


50미터는 힘들지 않았다. 내가 유유히 자리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말하던 걸 멈추고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 우와, 너 되게 빠르다. 그동안 몰랐는데 정말 멋져. "


"아니 뭐 그 정도 가지고 뭘. "


나는 약간의 여유를 부렸다. 너무 좋아해도 안될 것 같고 은주가 자주 하던 여유만만한 말투를 떠올리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은주처럼 우아해 보일까? 가슴이 벅차올랐다. 처음 느끼는 시선을 받으며 자리로 돌아가자 전현서 무리도 날 보고 있었다. 그 애들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비웃음도 기분 나쁜 웃음도 아닌 그냥 진심 어린 웃음말이다.


마음이 가볍다. 달리기를 좋아하던 나를 나는 잊고 있었다.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을 잊은 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느라 많은 시간을 써버렸다.


내가 나 자신을 응원하며 달릴 때 타인의 시선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달릴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스스로가 당당하기에 그동안 불편함을 느꼈던 동무들에게 진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유란 이런 것일까? 마음속 어딘가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학교를 마친 후 학원으로 바로 가야 하는 수빈이의 일정 때문에 난 혼자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더 이상 등하굣길은 어려운 골목이 아니었지만 곁에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 외로웠다. 오랜만에 달리기를 해서 기분이 좋지만 근육통이 확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벽화를 지나서 쭉 걸어가는데 골목 한가운데에 익숙한 뒷모습이 있었다. 백발의 머리에다 꼿꼿한 허리, 수빈이의 할머니였다. 분명 그때 가게에서 처음 만났을 터지만 보통의 할머니들과 다른 꼿꼿한 허리 덕분인지 알아보기가 쉬웠다.


쓰레기를 버리고 나오셨거나 간단한 산책을 하는 중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걸음은 뭔가 이상했다. 발을 하나씩 땅에 디딜 때 왠지 모를 느릿함과 어색함이 묻어있었다. 슬로모션을 건듯 느리게 걷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말은 걸지 않고 뒤를 따랐다. 그냥 지나치기엔 기분이 찜찜했다.


할머니가 갑자기 직진하던 걸음을 돌리더니 처음 보는 이상한 골목으로 빠졌다. 거기는 할머니가 갈만한 곳이 없는 골목이었다. 말을 걸려고 했지만 할머니가 가려는 장소가 왠지 궁금해서 잠자코 따랐다. 할머니는 점점 외딴곳으로 걸었다. 차라리 집에 갈걸. 괜히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나지막한 혼잣말이 들렸다.

" 여기다. "


할머니는 한 아파트 앞에 멈추어 섰다. 우리 동네에서도 잘 보이는 아파트였다. 아이보리색의 페인트로 칠해진 낡은 건물은 꽤나 오래됐지만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 309호가... 3층이었지? "


할머니가 알 수 없는 말을 대뇌이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대로 따라가야 할지 아니면 돌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색한 걸음으로 동으로 들어서는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 할머니! "


내 목소리를 못 들으신 할머니는 한치의 멈춤도 없이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무릎이 아프실 법도 한데 정말 빠르다고 생각하며 헉헉거리며 뒤쫓았다. 몇 층쯤 올라갔을까? 큰소리가 들려서 몸을 움찔하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내달렸다. 할머니 앞에 선 왠 젊은 여자가 호통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혼이 나는 학생처럼 축 쳐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헐레벌떡 다가갔다. 여자는 내 등장에 흠칫 놀란듯한 표정이었지만 학생이란 걸 알고는 다시 할머니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쯧쯧 찼다.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피고 눈에 힘을 준 채 무례한 여자 앞으로 다가갔다.


" 학생이 이분 보호자야? "


"네 맞습네다."


" 자꾸 우리 집에 와서 벨을 누르고 자기 집이라고 하잖아. 한두 번도 아니고,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신고할 거야."


그 말에 나는 할머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여기 분명 우리 집 맞는데.. "


할머니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며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턱밑으로 침이 줄줄 흘렀다.


" 아프신 것 같은데, 병원 좀 데려가봐 부모님은 없니? 아유 진짜 성가셔서... "


여자는 끝까지 매몰차게 말하곤 현관문을 쾅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할머니가 움찔하며 몸을 떠신다. 불안하게 비틀거리며 중얼거리시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잡았다.


" 얘야, 내가 지금 왜 여기 있는 거니?"


할머니를 부축해서 서둘러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없는지 확인하고 할머니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할머니 저 아시죠? 그때 단물.. 아 아니다. 음료수 주셨잖아요.”


“누구야? 나 집에 가야 해.”


할머니가 지니고 있던 밝은 웃음과 인자한 미소, 그리고 총명한 눈빛이 보이질 않는다. 새벽녘, 내가 홀로 눈을 뜨고 깜깜한 고아원 복도를 거닐 때 몰려오던 차가운 두려움이 밀려와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과 며칠 전의 할머니가 아득해진다. 할머니의 손을 있는 힘껏 꽉 잡고 눈앞에 보이는 공중전화를 찾아 들어가 수빈의 번호를 정신없이 눌렀다.


“수빈아, 나 영애야.”


나인걸 알자마자 수빈의 울먹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영애야 어떡하지. 우리 할머니가 갑자기 없어졌어. 엉엉 어디 간 거지. 골목을 다 뒤졌는데 안 보여. 할머니가 휴대폰도 두고 나가셨어.”


수빈이는 내가 말할 타이밍도 주지 않고 엉엉 울기만 했다. 나는 수빈이의 말을 끊고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 나랑 함께 있으니 울지 말고 어서 오라. 일없으니 천천히 오라. 차조심 하라우.”


이어서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다급한 말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계속 꿈속에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얼마 전의 그 총명한 눈빛은 어디로 간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관과 수빈이, 그리고 처음 보는 아저씨가 도착했다.


" 다행이다 정말 용감하고 착한 학생이구나 "


경찰관은 칭찬을 하며 이것저것 물었다.


" 할머니 어디 있었어? "


수빈이 엉엉 울며 할머니품을 파고들었다. 수빈이의 그 표정은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표정이었다.

" 할머니가 조금 아프시거든. 너무 고마워 너는 생명의 은인이야 "


수빈이 낮게 흐느끼며 코를 팽 풀었다. 수빈이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너무 고마웠다. 평생 잊지 않을게.”


아저씨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었다. 무려 5만 원이었다. 나는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저씨는 내 손에 억지로 돈을 지어주며 덧붙이셨다.


“어른이 줄 땐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야. 앞으로는 꼭 그렇게 해. 다음에도 아저씨가 용돈 줄 거니까 명심해라. 어떤 아이인지 궁금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고 멋진 아이였구나. 뭐든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다.”


수빈이는 울며 고맙다를 반복하더니 집으로 돌아갔다. 먹먹한 마음이 들어 나는 어떠한 말도 해주지 못했다. 집으로 들어와 아줌마의 밥을 먹고 드라마를 보는데 내 머릿속은 아까의 장면에서 멈추어 있었다. 용기를 낸 덕분에 할머니가 안전할 수 있었다니 기분이 좋아지면서도 할머니의 행동이 걱정되어 답답한 기분이 스미는 그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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