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러의 서울살이 생존일지
택시에서 목적지 하나 말했을 뿐인데 "아가씨 대구에서 왔나 봐요?"
소오름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절대음감인가?
기사님은 나의 출신 지역을 맞춘 기쁨에 환하게 웃으며 연이어 수다를 늘어놓으신다.
"마누라 고향이 대구예요. 그래서 잘 알아요. 거기 팔공산 있고 거 뭐더라 그거. 아가씨 그거 있잖아. 갓바위! 팔공산 갓바위 유명하잖아. 내가 산을 좋아해서 여기저기 많이 가는데 지난주에는 북한산을 갔거든. 산악회 모임인데 전국의 명산은 거의 다 갔잖아. 가면 내가 항상 선두에 서는데..."
대구 사람들이 과묵한 건 아직 모르시나 보다. 끝없는 수다 삼매경에 급 피곤함이 몰려온다. 갈수록 기사님 말끝이 짧아져서 어떻게 리액션을 해야 할지도 난감하다. 기사님의 출구 없는 수다와 질문에 마땅한 리액션을 찾지 못하고 그저 "네"라고 대답한다.
잘 버텨야 할 텐데. 목적지까지 아직 한참이나 남아서 걱정이다. 혹시 나의 리액션 때문에 기사님이 더 자신감을 얻으시면 어떡하지? 다음 승객에게도 폭풍 수다를 펼칠 기사님을 상상하며 알지도 못하는 다음 승객에게 미안해진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창밖을 본다. 날씨가 심상치 않다. 일기예보에 비소식은 없었는데 먹구름이 잔뜩이다. 흐린 날씨를 배경으로 기사님의 성량 좋고 빠른 말씀을 들으니 힙합이 별거냐 싶다. 그러고 보니 딕션도 좋으시고 예상할 수 없는 불규칙한 리듬이 신선하기도 하다. 말씀 주제도 다양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이번에는 정치와 경제다.
그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다. 나는 재야의 힙합 뮤지션과 함께 드라이브 중이다. 그의 신곡은 사회 비판적이지만 시사점이 있어서 대중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그의 등장은 느슨해진 힙합씬에 긴장감을 줄 것이고, 시니어 래퍼는 새로운 장르가 될 것이다.
"다 왔어요. 저기 횡단보도에 세워드릴게"
앨범 컨셉으로 뭐가 좋을까 구상 중이었는데. 얄짤없다. 기사님은 다 왔다며 빨리 내리라고 한다. 부랴부랴 내려서 걷는데 괜히 섭섭하다. 마누라랑 동향이라며 그리 반기더니...
하루는 택시를 탔는데 목사님이 호통치며 설교하는 라디오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때로는 장엄하게, 때로는 격정적인 어조로 사람들을 계속 야단쳤다. 택시 기사님은 어쩐 영문인지 목사님의 고함소리를 계속 들으셨다.
갑자기 점잖으셨던 나의 둘째 고모부가 생각났다. 왜 고모부가 한적한 시골에서 작은교회 목사님을 하는지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어릴 때 고모부가 진행하는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고모부의 고상한 성품이 그대로 전해지는 잔잔한 예배였다. 좋은 말씀들 같지만 마치 린스처럼 미끄덩 흘러내려서 기억하기는 어려운 그런 설교였다. 예배 참석자는 나를 포함해 모두 7명이었다. 고모와 사촌동생도 포함이다.
고모부 걱정도 잠시, 라디오 속 대형교회 목사님은 주여 삼창을 외치며 울부짓기 시작했다. 택시 안은 어느새 클럽보다 시끄러운 공간이 되었다. 한껏 집중해서 듣는 기사님을 보니 라디오 볼륨을 줄여달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할까 말까 계속 고민만 하다가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 에잇, 내릴 때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말 걸..
하루는 동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했다. 처음 본 미용사 분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퇴근하고 오셨나 봐요?“
맞다고 하니 직장은 어딘지, 집은 어딘지, 출퇴근이 힘들진 않은지 계속 물어보셨다. 꼬리물기식 질문 스킬은 놀라웠다. 마치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처럼 끝없이 전개되는 출구없는 스몰토크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한 번도 같은 택시를 타본 적이 없고, 우리 동네에 미용실은 20개가 넘는다.
서울에는 셀 수 없는 선택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