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화려함과 어두움이 양립하는 도시 풍경
1980년 대 중·후반의 대한민국 도시는 화냥끼 가득한 돈의 유혹이 절정기에 이른 시기다. 돈은 사람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인권을 물건처럼 취급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버섯처럼 일상생활에 파고들었다. 그 당시 범죄자들 중 인신매매와 어린이를 유괴하는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는데 모두 돈 때문이었다.
살인, 폭력, 인신매매와 납치 같은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리자, 5 공화국(1981년~1988년)의 전두환은 ‘삼청교육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일선 경찰서에 할당제를 적용시켜 경찰서끼리 경쟁적으로 범죄자와 일반인까지 잡아들이도록 하고 악명 높은 교육을 실시했다. 머리가 길어도 잡혀가고, 나팔바지에 나시티를 입었다가 문신이 보여도 잡혀갔다. 멀쩡한 직장인이 밤에 술을 마시고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하고 노래를 부르다가 경찰에 잡혀 갔다가 몇 개월 만에 집에 왔는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6 공화국에서는 범죄의 심각성이 더해지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조직폭력배와 민생사범들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범죄는 없어지지 않고 지능화된 조직으로 새롭게 변하면서 대담해졌고 급기야 불특정 다수를 노리는 디지털 범죄로 이어져 오고 있다. 범죄를 예방하는 사회구조와 제도를 만들 능력이 안되자, 범죄자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국민 앞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 것이다. 얼마나 무지막지한 정권과 무능한 행정부였는지 지금의 범죄 현황이 말해준다.
당시 공중화장실에 들어가면 벽면에는 ‘신장·간 파실 분(사실 분)’이나 ‘급전 필요하신 분’이란 노란색 스티커가 전화번호와 함께 곳곳에 붙어 있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이들에게 연락을 하면 회사원으로 위장한 조직폭력배들에게 몸과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평생 동안 짐승처럼 살아야 했던 슬픈 시대였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농·어촌의 주민들은 도박과 술에 의지하게 되고, 가난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도시로 간 자식들은 악마 같은 돈의 유혹에 빠져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신체 일부를 팔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고리대금업체의 이자를 갚지 못해 빚더미를 지고 삶의 막바지에 몰린 사람들이었다.
시장의 후미진 곳이나 터미널 혹은 은행 근처를 지나다 보면 ‘야바위’ 꾼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자~ 자~, 돈 놓고 돈 먹기, 여기 빨간 점 있는 카드를 맞추면 놓은 돈의 2배를 드립니다.”하고 떠들어 댄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 정신이 없을 때 바람잡이들이 만원을 놓고 이만 원을 가져가는 연기를 하며 주변을 힐끔거리고 있다. 야바위꾼들의 은어로 돈 많은 “호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시골에서 자식을 만나러 금방 올라온 노인이나 어수룩한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장난 삼아 한 번 해보라고 하면서 유혹한다. 간혹 담배를 연신 피우면서 얼굴이 상기된 어른들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야바위꾼들에게 돈을 잃어서 그런 것이다.
이런 야바위꾼들이 은행 근처에서 판을 벌리는 이유는, 당시에는 회사에서 지급하는 월급을 통장으로 입금시키지 않고 노란 봉투에 담아서 현금으로 지급을 했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이 통장에 입금을 하기 위해서 은행으로 가는 것을 노리고 야바위꾼들이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1985년 9월 25일경 추석 연휴를 3일 앞두고 회사원 A 씨는 조퇴를 했다. 은행에 가서 돈을 찾고 추석 때 고향에 내려갈 선물 채비를 하기 위해서다. 부모님에게 드릴 용돈과 동생들에게 줄 선물을 사려면 은행이 문을 닫기 전에 돈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ATM 지급기가 없었던 시절이니 은행에 갈 때 통장과 도장은 필수적으로 가지고 가야 한다. 은행에서 돈을 찾고 동생들의 옷과 신발을 사기 위해서 도시의 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점심을 급하게 먹고 온 A 씨는 빨간 떡볶이와 하얀 설탕이 듬뿍 묻은 꽈배기의 유혹에 빠져 시장 중앙에 놓인 포장마차에 앉아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순간 옆에 앉은 아가씨가 어묵 국물을 쏟으면서 A 씨의 바지에 흘렀고 A 씨는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아가씨는 큰 소리로 “어머나!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하면서 A 씨의 바지 자크 부분을 툭툭 치면서 휴지로 닦았다. 순간 A 씨는 반사적으로 괜찮다고 하면서 멋쩍게 웃었고, 여성은 죄송하다면서 A 씨의 떡볶이와 꽈배기 값을 내고 갔다.
9월이지만 낮에는 햇볕이 뜨거워 검은색 여름 양복바지와 빨간색 반팔티를 입은 A 씨는 지갑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시장 옷가게에서 동생들의 옷을 고른 후 값을 지불하려고 하는 순간, A 씨는 하늘이 노랗게 물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아뿔싸, 아까 그 여자에게 소매치기를 당했구나.” 속으로 외치면서 정신없이 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에게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신고를 하자, 피해자 조서를 꾸미는데 20분이 걸렸고 현장에는 갈 생각도 안 한다. 잃어버린 100만 원 보다 “회사에 가서 기다리면 연락한다.”면서 태연하게 말하는 경찰을 보자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었다. A 씨는 경찰에게 “지금 가면 범인을 잡을 수 있으니까 시내에 경찰병력을 배치하고 시장 주변을 뒤져보자”라고 했지만 경찰은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이 핀잔을 주면서 범인은 우리가 잡을 테니까 집에 가서 기다리고 한다. 결국 A 씨는 돈을 찾지 못했고 그 후에도 경찰은 연락을 주지 않았다.
명절이나 주말 같은 황금연휴에는 사람들의 주머니가 두둑하다. 수표를 사용하기는 개인정보 유출 때문에 찜찜하고 카드도 없던 시절이니 주머니의 지갑은 현금이 가득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1980년대에는 소매치기라는 기술이 유행했었다. 백화점이나 시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항상 남의 호주머니에 든 지갑을 노리는 소매치기들이 있다.
4~5명씩 한 팀을 이룬 소매치기들은 날카로운 면도칼로 무장하고 남성들의 안주머니를 째는 '안창따기', 비싼 손목시계를 낚아채는 ‘짱채기’, 금이나 귀금속 목걸이를 채 가는 '굴레따기', 지갑이 든 바지 뒤쪽 호주머니를 째는 '똥빵채기' 등 다양한 기술로 돈을 노렸다. 우리나라는 1965년 전국에 3300여 명의 소매치기가 있었고, 1980년대 중후반부터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매치기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절도범죄를 저지를 때 도포나 두루마기 따위 웃옷의 옷소매 안에 돈이나 귀중품을 넣어 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도시는 쩐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살벌한 곳이었다. 쩐의 전쟁터에서는 돈이 곧 무기였다. 내가 살기 위해서 적을 죽여야 하는 전쟁터에서 무기는 곧 나의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쩐의 전쟁터에는 양지와 음지가 있었다. 양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법 없이도 잘 살아가는 선량한 국민들이라면, 음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하이에나 같이 먹이를 노리는 범법자(犯法者)들이 대부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이 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만들어 낸 “쩐의 전쟁”은 인류가 생존하는 한 지속되어야 할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양지를 지배하는 것이 법이라면, 음지를 지배하는 것은 돈이었고 돈은 곧 권력의 원천이 되어 밤의 황태자를 탄생시키고 있었다. 낮을 의미하는 양지의 세계와 밤을 의미하는 음지의 세계는 아직도 존재한다. 금수저와 흙수저로 불리우는 유전적인 영향으로 돈이 있으면 양지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돈이 없으면 음지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