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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로 Sep 15. 2021

공순이를 아시나요?

1980년대 도시의 여성 근로자들

수십대의 재봉틀이 ‘드륵 드르륵’ 굉음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돌아간다. 당시 공순이라고 불리는 도시의 여성들이 가장 많이 취업하는 곳이 경공업이라고 불리는 신발공장과 봉제공장이다. 1980년 대 초까지 서울의 구로공단과 평화시장은 봉제공장의 전성기였다. 구로공단은 1964년 5월 20일 한국산업단지공단의 전신인 사단법인 한국 수출산업공단이 공단을 조성하면서 문을 열었다. 지금은  IT 첨단 산업 단지로 육성해 이름도 ‘서울 디지털 산업단지’로 바뀌어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재봉틀을 섬세하게 잘 다루어야 하는 봉제공장의 생산현장은 남자가 드물었다. 남성 직원들은 재봉틀을 고치며 업무를 감독하는 반장이나, 재단실의 직원들이 전부였다. 교실 같이 탁 트인 생산현장에는 여성 직원들이 50명이면 남자 직원들은 10명 미만이다. 그래서 봉제공장의 남성들은 결혼을 쉽게 할 수 있었고 총각들이 선호하는 직업이기도 했다.

      

당시 봉제공장의 경영진들을 보면 사장을 중심으로 한 이사들은 가족이나 친인척이 대부분이고, 부장이나 과장 그리고 공장장 같은 중간 간부들은 모두 사장과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연관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족벌경영(族閥經營)의 폐단은 사회주의의 공산당과 같이 기득권의 부패로 이어져 기업경영을 위태롭게 했으며, 노동자들과 경영진과의 불신의 벽만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근무환경은 열악하기만 했다. 과로로 인한 질병이나 부상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거나 담당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적당하게 처리하는 것이 관례라고 할 정도였다.  노동자의 인권은 회사에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주느냐에 따라 등급이 정해진다. 그러다가 관리자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역적(逆賊)이 되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퇴직하게 된다. 

     


고향이 충남 삽교천인 A양은 21살이지만 봉제공장의 조장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6살부터 일했으니 5년 차 경력의 베테랑이다. 가방을 만드는 이곳은 플라스틱이나 쇠 같은 장식이 많아서 자칫 잘못하면 재봉틀의 바늘이 부러지기가 일쑤다. A양이 있는 조는 지퍼를 달고 손잡이 끈을 달기 때문에 집중력과 스피드가 필요한 공정이라서 이곳에서 일하는 4명은 재봉틀 실력이 뛰어나다. 

     

당시에 회사들은 주 6일 근무를 했다. 수출의 선적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 A양은 2달째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평일에도 밤 10시에서 12시까지 일을 해야 하니 몸이 녹초가 되어있었다. 일주일에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일요일에도 특근을 한 여성들의 몸은 거의 기계적으로 재봉틀의 페달을 밟고 있다. 밥 먹고 일하고 잠자는 것이 몸에 베여있는 A양의 유일한 취미는 라디오를 듣는 것이었다. 

     

특근이나 야근을 시키는 것도 순진하고 착해서 말이 없는 어린 여성들만 골라서 시키기 때문에 동료들이 묻지 않으면 초과근무를 했는지도 모른다. 월요일 아침 A양은 5년 동안 일하면서 처음으로 출근을 못하고, 잠자리에서 울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에 어머니와 통화를 한 후 밤새 울었던 것이다. 며칠 전에 3년 동안 모은 돈을 삽교천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에게 주면서 소 한 마리와 작은 텃밭을 사라고 돈을 드렸는데, 그 돈으로 놀음을 하다가 싸움을 해서 경찰서에 잡혀 갔다는 것이다. 

     

A양의 아버지에게 맞은 상대방은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돈을 날려버렸다는 슬픔보다 전화기 속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어머니 때문에 더 슬펐다. 울고 있는 A주임의 기숙사에 반장이 와서 빨리 나오라고 소리친다. 룸메이트들이 A주임의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반장은 결국 A주임을 끌고 와서 자리에 앉히고 밀려있는 일을 마무리하라고 시켰다. 

     

한참을 일하던 A양은 ‘악~~’ 소리를 내며 엄지손가락을 잡고 있었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재봉틀 바늘이 손톱에 박혀 부러진 것이다. 이럴 때는 병원에 가서 얼른 뽑아야 하는데 반장이 ‘야 XXX! 뭘 봐! 일들 똑바로 못해!’ 하면서 욕을 하더니 펜치로 부러진 재봉틀 바늘을 뽑으려 한다. 순간 A양은 쪽가위를 잡고 있던 오른손으로 반장의 손등을 찍으면서 소리쳤다. ‘손대지 마! 죽여 버리기 전에.’  시끄럽던 재봉틀 소리가 멈추고 반장은 손등을 붙잡고 사무실로 뛰어가 버렸다. '어머 어떡해~' 탄식소리가 들린다. A양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엄지손가락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 룸메이트들이 따라 나갔다. 

     

A주임은 그 뒤로 볼 수 없었다.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누적된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깜박 졸다가 재봉틀 바늘이 손톱에 찍혀서 부러지거나 손톱에 박히면 병원에 간다. 그나마 다행으로 재봉틀 바늘이 손톱을 관통해서 손톱에 찔리기만 하면 재봉틀 기름에 손을 담근 후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미싱사들이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다른 동료들이 내 몫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참고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지만 몸이 불편해서 잔업을 거부하거나, 근로조건에 불평을 하면 관리자들이 회유와 협박을 해서 퇴사하게 만든다.

     

기하학적인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건물들은 형이하학적인 모습으로 문명의 허영심을 드러낸다. 밤에는 낮의 모습을 감추고 손님을 맞이하는 마담처럼,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치장하고 요란한 음악 소리로 피곤에 지친 근로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한 잔 술에 고단한 몸과 지친 마음을 달래고, 두 잔 술에 마음속에서 끓고 있던 뜨거운 상처를 달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도시의 공돌이들. 그리고 라디오를 듣고 동료들과 달달한 과자를 먹으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순수하고 당찬 공순이의 사랑은 그래서 더 아름답고 애잔했다.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사랑을 지켜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랑은 모성애(母性愛)에서 기인한다.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것은 자신의 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사랑이다. 우리 어머니들의 희생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이나 가진 것 등을 바치거나 포기함’을 가진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다. 육체의 생명을 바치고, 영혼의 마음까지도 다하는 숭고한 사랑인 것이다. 마음이 순수했던 도시의 남자와 여자들은 몸을 주면 마음도 주어야 한다는 ‘사랑의 공식’을 믿었고, 서로의 희생으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민족적인 유전성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너와 나 혹은 나와 너는 늘 상대성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로의 관계가 어떻게 정립되는가에 따라 적이 될 수도 있고, 아군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회사생활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 대 회사의 사장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우리 회사는 가족 같은 회사입니다.’ 하고 말하지만, 사장이 말하는 가족이란 개념과 사원들이 원하는 ‘가족’은 너무나 달랐다. 그 당시에도 사장들은 근로자들에게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열정 페이’를 원했고, 근로자들은 근로조건 개선과 불평등 처우를 없애서 회사 구성원 모두 잘 살아가는 가족이 되길 원했다.


가난한 여성들이 돈을 벌겠다는 열정 하나로 열심히 일하지만 돈을 모아서 원하는 꿈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었다. 직장에서 상사의 갑질과 불평등한 처우로 인한 인권유린을 당하는 여성 직장인들이 대다수였다. 성추행이 횡행했지만 당시에는 성인지 감수성이 낮아서 범죄로 인식하기보다는 심한 장난으로 생각했다. 성폭행이 일어나면 여성들이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벌어진 나쁜 행동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경찰에 신고를 해도 2차, 3차 피해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이 두려워 혼자서 힘들어하다가 자살을 하거나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법원에서 성폭행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성들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장면들을 재현을 해야 했는가? 판사들이 눈을 반짝이고 방청석에서는 침을 흘리면서 성폭행 당시의 여성과 남성의 행위를 증명하는 과정은 요즘 ‘19금’ 영화보다 더 야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과거이다. 직장을 그만둔 여성들은 이렇게 고달픈 현실에서도 가족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기에 술집에서 일을 하다가 사창가에 가게 되고 마지막으로 다방에서 일하게 된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같은 마음으로 삶을 살았던 우리나라 여성분들에게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전하고 싶다. 한 송이 예쁜 꽃으로 태어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꺾여 세상에서 사라진 향기를 그리워하며......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성들이지만, 그 남성을 지배하는 것은 여성이다. 

    

    [서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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