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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Oct 08. 2024

카리브 해에 뛰어들다

쿠바 여행기 7일

2023.12.02.토요일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디스코텍까지 가서 놀고 와서 그런지 너무 피곤했다. 아주 늘어지게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떴다. 슬슬 나와서 아점을 먹고 동네 산책을 하려고 했는데 밖에 나오자마자 이건 아니다 싶다. 햇살이 너무너무 뜨겁고 너무너무 덥다. 아무래도 해가 질 때까지는 어디선가 이 더위를 피해야 겠다. 숙소는 에어컨이 있어서 시원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숙소에 죽치고 있을 내가 아니지. 이 근처에서 유명하다는 앙콘 해변에 가야겠다. 안그래도 카리브해에 몸을 담그기 위해 수영복과 아쿠아슈즈 등을 준비해왔다. 드디어 개시다. 

앙콘 해변에 가려면 택시를 탈 수도 있고 버스를 탈 수도 있다. 버스는 한시간에 한대꼴로 있다고 했다. 숙소 주인이 안내해준 여행사 사무실에 가서 버스표(5달러)를 사려니까 현금도 가능하지만 카드도 가능하단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생각보다 비싼 교통비, 식비 때문에 현금이 간당간당했는데 잘 되었다. 버스비는 여행사에서 계산하고 표를 받아도 되고 버스에서 이동식 단말기로 계산해도 된다. 쿠바에 와서 이동식 카드 단말기는 처음 본다. 2층 버스라서 잽싸게 올라가서 제일 앞자리에 탔다. 나는 아직도 2층버스가 신기하고 즐겁다. 버스는 시내의 메인 도로를 통과하고는 곧 한적한 시골길을 달린다. 양콘 해변을 향해 가면서 근처의 리조트를 몇 군데 들려서 사람을 태우고 간다. 길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우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뜨거운 햇볕에 대단한 열정이다. 

어느 리조트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버스가 리조트 현관에 잠시 정차했다가 출발을 했다. 그런데 2층에서 내려다보니까 어떤 노부부가 리조트 안쪽에서 허겁지겁 나오는 것이 보였다. 2층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저들이 늦었네라고 중얼거렸는데 버스기사가 그들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버스는 그냥 출발해버렸다. 순간 다들 소리로 저들을 태워야해, 차를 세워야해라고 외쳤지만 1층의 버스기사에게는 들리지 않았나보다. 자리에 있던 여행객들은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약간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한시간 후에 버스가 있으니까 그들은 그걸 이용하게 될거야, 그들은 로비 앞에 나와 있어야했어 등등 한동안 떠들어댔다. 리조트가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 버스가 아니라면 이동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이래서 항상 버스를 타는 곳 바로 앞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30분 정도 달려서 드디어 앙콘 해변에 도착했다. 



앙콘 해변에 도착해서 내리면서 버스의 마지막 출발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6시 30분이 마지막 버스란다. 물론 내가 그 시간까지 여기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확인해두어야지. 늦은 오후에는 트리나다드 시내를 구경할 예정이므로 여기서 두세 시간 정도 놀다가 나가야겠다. 

앙콘 해변에는 야자수 그늘막과 선베드들이 쭈욱 늘어서 있다. 당연히 이용료(100쿠바페소)가 있다. 이런 것은 전세계 해변의 룰인가 보다. 해가 너무 뜨거워서 선베드와 그늘은 필수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필수 요소는 시원한 맥주(300쿠바페소)다. 카리브 해의 푸른 바다에 몸을 담그고 나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는 진리다. 맥주와 간단한 스낵을 먹고 또 잠시 쉬다가 다시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다 보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카리브 해는 우리 나라의 동해와 서해가 혼합된 것 같다. 짙푸른 바다지만 사람이 여유롭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얕은 구간이 꽤 넓게 펼쳐져 있다. 생각보다 멀리까지 걸어갈 수 있다.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깊은 바다는 아예 갈 수가 없다. 내가 바다에 들어갔다는 것은 수영이 아니라 바다 산책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변 근처의 바다를 살살 산책하면서 물 속에 있으니까 시원하다. 내가 바다 산책을 하고 있으려니까 나와 비슷한 수준의 여행객들이 왔다 갔다 한다. 다들 자기 만의 방식으로 카리브 해를 즐기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한참 물놀이를 하고 나니까 좀 지쳤다. 스케치북을 꺼내서 그림을 그리면서 노닥거렸다. 자연히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서양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그늘에 있던 선베드를 밖으로 끌어낸다. 그리고 일광욕을 즐긴다. 역시 서양사람들과 동양사람들은 태양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 굳이 그늘을 찾아 들어가면 주로 동양인, 굳이 태양을 찾아 나가면 주로 서양인이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에 필요한 방식으로 이런 행동 패턴이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커플 재밌다.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은 싸운 것 같다. 순전히 추측이지만. 여자는 여자대로 일광욕을 하다가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온다. 남자는 남자대로 음악 들으며 일광욕을 하다가 맥주를 사와서 마신다. 그들은 별달리 대화가 없었다. 

역시 별달리 할 일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커플 구경을 한참동안 했다. 혼자 여행하다보면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느긋하게 한 장소에서 쉬면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경치가 내 눈을 사로잡지만 나중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더 재밌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장엄하지만 인간 행동의 예측 불가능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흥미롭다. 

동네 고양이들도 오가고 가족 단위로 놀러온 사람들도 오간다. 내 자리 뒤쪽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일가족이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고 가족들은 신나게 바다에 들어가서 논다. 특히 손자, 손녀를 중심으로 아이들의 부모가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난리다. 그런데 할머니도 바다에 들어가고 싶지 않을까? 나와 눈이 마주친 할머니는 환하게 웃는다. 그냥 손자, 손녀가 노는 장면만 봐도 즐거운 것 같아 보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할머니들의 마음은 비슷한가 보다.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되어 한동안 이 가족들을 지켜보았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그 위에 떠 있는 멋드러진 요트, 그리고 짙푸른 바다 색이 어우러져서 너무 예쁜 풍경이다. 스케치하기 좋은 풍경이다. 그런데 내가 밑그림을 그리고 나니까 요트가 사라졌다. 뭐야? 요트 어디 갔니? 자연은 그대로인데 인간이 만든 것들만 사라졌구나. 뭐랄까? 인간의 유한함이 느껴진달까? 사람 구경도 하고 음악을 들으며 스케치도 하다가 졸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바닷가에서 노는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앙콘해변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이 좋았다. 



앙콘 해변에서 한참 놀고 나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상쾌하게 씻고 잠시 쉬다가 나와서 맛집을 찾아 나섰다. 랑고스타를 비롯해서 여러 음식이 다 맛있다는 후기가 있어서 그 맛집을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찾을 수가 없다. 구글맵의 정보가 틀렸나보다. 혹시나 해서 근처를 샅샅이 뒤졌으나 그런 식당은 없다. 근처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고개를 갸오뚱한다. 다시 더위에 땀범벅이 되고 지쳐서 그냥 집근처의 식당에 갔다. 소스가 별로 없는 파스타가 3,000쿠바페소였다. 윽! 여기 물가 너무 심하다.

그런데 너무 느긋하게 굴었나보다. 식사 후 박물관에 갔는데 이미 문을 닫았다. 워낙 작은 박물관이라 전시물은 별로 볼게 없고 꼭대기에서 보는 노을이 이쁘다고 해서 노을 시간에 맞추어 갔는데 입장 시간이 지났는지 문이 닫혀있다. 정해진 시간 상으로는 아직 문닫을 시간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야속하게도 문을 닫아 버렸다. 뭐 물어볼 대상조차 없다. 에휴. 아무래도 나는 쿠바의 박물관들과 인연이 닿지 않나보다. 박물관 앞에서 허무하게 외관 사진만 찍고 돌아서야 했다.

트리나다드의 중심 공원 쪽을 향해 산책하는데 길거리에 그림을 파는 노점이 있다. 제법 큰 크기의 그림부터 작은 그림까지 다양한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쿠바노(쿠바사람)들은 정말 손재주가 뛰어난 것 같다. 자칫 촌스러울 수 있는 색깔인데 과감하게 사용하여 쿠바의 특징을 잘 살린 그림을 그린다. 여행 일정이 짧다면, 혹은 가져갈 방법이 있다면 큰 그림을 가져가고 싶다. 어느 흰 벽에 걸어 두면 그 벽을 뚫고 쿠바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림들이다. 



길거리의 그림을 구경하고 근처의 공원을 산책하다가 오늘의 마지막 코스로 음악의 전당으로 갔다. 계단식으로 된 골목에 테이블과 의자가 깔려있고 무대가 있다. 저녁 식사나 술 한 잔을 하면서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느긋하게 앉아서 모히또 한잔(400쿠바페소)을 하면서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즐겼다. 여기 와서 다이끼리, 모히또 등의 칵테일을 많이 마시게 된다. 나는 맥주파지만 가끔은 이런 이국적인 정취의 칵테일도 괜찮은 것 같다. 역시 주변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흥겨운 음악과 관광객들 사이에 앉아 있으려니까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루가 다 지났다. 하루 종일 한 것은 해변에서 멍때리기, 시내에서 멍때리기다. 여기저기 막 돌아다니지 않아도 심심하지 않은 것, 그게 쿠바 여행의 매력인 것 같다. 거기에 흥겨운 음악은 소스 한 스푼? 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소스가 없으면 밍밍하다. 쿠바에서 음악은 그런 것 같다. 음알못(음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쿠바의 어느 곳에서나 들리는 흥겨운 음악은 재료들에 맛을 입혀주는 소스같다. 아까 본 해변, 길거리의 그림들, 이 골목의 풍경에다가 지금 들리는 음악이 한 스푼 더해져 오늘의 여행을 잘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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