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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iin Mar 03. 2024

행복할 줄 알았지?

어쩌다 런던 정착기, 육첩방은 남의 나라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 곧 착륙합니다. 히드로 공항, 현지 날씨 맑습니다."


"잠깐, 현지 날씨가 맑다고? 영국은 맨날 비 오고 그러는 거 아니었나."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지금도 맨 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이 나라를 배운다. 비웃어도 어쩔 수 없으나 나는 미스터빈이 미국인인 줄 알았고, 해리포터 시리즈는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영화도 두 번째 편 이후로는 찾아보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미 알아차리셨겠지만, 굳이 "두 번째 편"이라 하는 이유는 그 제목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 때 전 세계 21%를 호령했고, 그 면적이 명왕성 전체 표면적에 맞먹는다는 제국에 몹시 죄송스럽지만 어쩌겠는가. 이 나라는 1년 전 석사 입시원서를 던질 때까지도 내 계획에는 없던 사고이자 우연이다.


비행 편이 취소되고, 언제 국경이 막힐지 모르는 상황을 헤치며 마침내 공항에 내렸다.*


공항이라는 공간은 참 기묘하게도 어디에서든 익숙한 기시감을 일으킨다. 나는 인천 하늘을 잠시 배회하다 도로 인천 땅에 사뿐히 내린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기장의 안내방송처럼 날씨는 찢어지게 화창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여권파워 (Passport Power)란 이런 것인가. 수없이 몰려드는 방문객 중 한국인은 자동입국심사대를 통해 가뿐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렇게나 싫다며 유난을 떨었는데, 내 모국의 단맛을 이렇게 보는 것이다. 공항직원들은 알록달록한 여권 중 초록여권 소지자들을 귀신같이 골라냈다. 한 무리의 코리안들이 자동출입국 기계 앞에 늘어섰다.


화창한 날씨에 수월한 입국심사까지, 이 정도면 어지간히 애를 먹인 이 나라를 용서할 수 있겠다 싶었다. 어림없다.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가는 여유가 나에게 허락될 리가 없었다. 출입국 심사대에 여권을 올려두고 카메라를 쳐다보자마자 기계가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출입문은 앞으로도 뒤로도 열리지 않았고 작은 유리막에 가로막힌 나를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이 망할 놈의 나라. 기계부터 인종차별을 하는 건가. 닫힌 문을 꾸역꾸역 뚫고 나와 아날로그 입국심사대 앞에 다시 줄을 섰다. 5초 컷의 달콤한 꿈은 한 시간의 무료한 기다림으로 와장창 무너졌다. 더 없는 피로와 짜증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백인 입국자에게는 "Welcome to the UK"를 연발하던 한 심사관은 동양인만 마주했다 하면 시시콜콜한 서류를 하나부터 열까지 요구하며 하염없이 깐깐해졌다. 한심한 파워게임을 하는 꼴이란. 보고 있자니 그에게 "얼마나 대단한 나라라고 이렇게나 비싸게 구느냐"라고 빽 소리를 질러주고 싶었다. 트라팔가 광장보다 공항 백 룸을 먼저 구경할 수는 없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 차례가 되면 한껏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헬로와 땡큐를 연발한다.


패딩턴 행 기차에 녹초가 되어가는 몸을 던졌다. "패딩턴베어의 패딩턴이랑 같은... 뭐 그런 건가?" 시답잖고 무식한 공상을 펼친다. 창밖으로 처음 보는 런던이 흘렀다. 사실 어떻게 기숙사까지 갈 것인가 같은 좀 더 현실적이고 불안한 문제들을 고민했던 것도 같다. 익숙해지고야 마는 것들은 걱정 많던 그날의 나를 서서히 지워간다.


패딩턴역을 벗어나자마자 찍었던 사진. 그래도 마음 한 켠은 설렜나 보다. 이렇게 아무것에나 셔터를 눌러댄 것을 보면.

여기저기 공사를 해대는 탓에 정신을 쏙 빼놓는 역전에서 우버기사는 용케도 나를 알아보았다. 가뿐히 내 집채만 한 슈트케이스 둘을 트렁크에 싣더니 노련하게 복잡한 길을 빠져나갔다. 규칙적인 엔진의 떨림을 따라 푹신한 시트로 무거운 몸이 가라앉았다. 버버리 코트 색으로 뒤덮인 건물들, 빼곡한 남의 집을 가로지르는 좁다란 길을 천천히 지났다. 여기에는 우리 집이 없구나. 쓸 데없이, 예기치 않게 감상에 젖어드는 나는 집에서 너무 멀리 와버린 사실이 갑자기 서글펐다. 쉽게 쉽게 살 수는 없는 건가. 나는 구글맵에 찍은 좌표와, 인터넷으로 본 만져보거나 열어볼 수 없는 매트리스와 열어볼 수 없는 문을 보고, 사람인지 AI인지도 모를 상담원과 어설픈 몇 마디를 나눈 뒤 덜컥 낯선 거처를 구했다.


기숙사 근처에 다다르자 우버기사는 나를 돌아다보며 "여기가 맞느냐"라고 물었다. 나도 처음 와보는 데 알 리가 있나. 당황한 눈빛으로 "Erm, I think so"하니 내가 못 미더운 기사는 제 스마트폰을 꺼내 내게 지도를 내어 보였다. “여기가 맞아.” 한시가 바쁜 그는 덩그러니 나와 나의 덩치 큰 슈트케이스 두 개를 내려두고 떠났다. "Good luck with your life in the UK"라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어정쩡한 폼으로 자동문 앞에 선 나를 본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 입주하는 거예요?" 

"네, 세 명이 화장실 두 개 공유하는 방으로 계약했는데요."


서류를 받아 든 직원이 잠시 모니터를 들여다보더니 내 손에 파란 키팝(Key FOB)을 쥐어주었다. 그는 뒷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 다시 매섭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엉거주춤한 채 어리숙한 표정을 짓는 나를 흘긋 본 직원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까지 올라가라"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 땡큐.”


개성이 박멸된 공간이란 이런 것일까. 나는 값비싼 고시원 한 칸을 구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취향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기능에만 충실한 설계. 아마도 가장 저렴한 자재로 황급히 채워 넣었을 투박하고 못난 방에 짐 가방을 던지고 숨을 몰아 쉬었다. 


대단한 일을 해내야 할 것만 같은 중압감이 이 방구석구석에 빈틈없이 스며있었다. 막막했다. 어쩐지 덩그러니 이곳에 뚝 떨어졌다는 공허함이 몰려든다. 이제는 나의 이름도, 얼굴도 가물해진 나의 대학 선배는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휴학을 하겠다고 하니 우리 아빠가 그러더라. Y야, 네 인생은 너만의 인생이 아냐. 아빠가 너를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과 정성과 자본이 있으니, 네 결정은 아빠의 인생이기도 해.”


내 엄마가 한 말도 아닌데, 난 그 말이 그렇게도 숨이 막혔다. 이 13층 작은 방에 그의 들어본 적도 없는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얘, 이건 너만의 인생이 아냐. 네 엄마의 삶이기도 해.”


눈물이 났다. 나는 참 이기적 이게도 이 대책 없는 도피유학을 시작했다. 얼룩진 도화지는 찢어버리고 깨끗한 새 종이에, 질 좋은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이런저런 근거와 핑계를 주렁주렁 달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피하고 싶은 못난 현실은 잠시 못 본 체하며. 이제 깔끔하게 시작만 하면될 일인데 누군지도 모르는 Y 선배의 부친이 나를 울리는가.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나 도착했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노란 ‘1’이 사라진다.


"응, 어서 밥 먹어. 우린 이제 잔다."


참 뻣뻣한 우리 엄마는 이 한마디를 하려 까무룩 내려앉는 눈꺼풀을 부여잡고 기다렸다. 나는 엄마도 밉고, 나도 밉고, 이럴 수밖에 없는 현실도 미웠다가 또 빈 속으로 한참을 달려온 나를 걱정하며 잠 못 이루는 근심이 사무치게 고마웠다가. 꼼짝없이 뒤엉켜 타레가 되어버린 감정 한가닥 한가닥에 꽁꽁 묶여 속절없이 울었다. 나는 왜 이 모양으로 생겨먹었는지, 참. 집에서 멀리멀리 떠나면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내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집에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엄마의 고혈을 빨 것이고 이런 나를 엄마는 묵묵히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내게 "네 엄마가 혼자 너희 둘을 다 키웠으니 늬들이 엄마한테 잘해야지." 하던 이들은 더 소란스럽게, 더 무례하게 우리 가족을 흔들어댈 터였다. 마주한 현실에 화가 치미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현실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 더 괴롭다. 무엇을 이뤄야 한다는 얼굴 없는 목소리가 윙윙 귓가를 울린다. 이 도피유학이 끝나면 나는 행복해질까?



*실제로 내가 비자센터 면접을 마친 며칠 뒤 영국 비자 사무소가 모두 문을 닫았다. 한발 늦은 사람들은 비자센터가 영업을 재개할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고, 그 기다림은 한참을 길어져 크리스마스 직전에야 간신히 영국 땅을 밟은 유학생들도 있었다.


2020년 9월 8일, 가족들 생일은 물론 내 생일도 줄곧 깜빡하는 내가 기가 막히게도 잊지 않는 날. 내가 런던에 내린 날이다. 그날 그 첫 발을 디딘 일이 계획을 한참 넘겨 이 나라에서 삶을 꾸릴 시발점이었다니. 삶이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말의 실체를 경험한 것 같아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매년 그날이 다가오면 나는 "예이, 또 1년 살아냈구나 고생했어." 하며 홀로 작은 것들을 이뤄가는 나를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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