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른이 되고 마는 걸까?
영국 정착기를 차근차근 마무리하고 나면 가장 근래의 이야기, 그러니까 먹고사는 투쟁기, 현실과 이상의 낙차를 매일매일 견디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조근조근 풀어내고 싶었다. 지나간 일은 과거에 남고, 다가오는 미래는 현실의 나를 뒤흔든다. 옛이야기를 하는 순간에도 오늘의 내가 휘둘리는 일은 예고도, 경고도, 통첩도 없이 들이닥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진리 하나쯤 얻은 듯이 고고하고 정돈된 말을 써대는 내가 참 역겨워진다. 나는 여전히 종이에 슬쩍 베인 손끝을 보며 갖은 호들갑을 떤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타인을 실컷 욕한다. 그런 미생일 뿐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위선에 지쳐 잠시 꾸밈없는 마음을 슬쩍 꺼내본다.
아직 내 이야기에 코빼기도 비춘 적이 없는 나의 애인은 내가 이름 붙인 "The Late 20s' Crisis"를 지나는 중이다. T는 삶이 텅 빈 것 같다고 했다. 더 이상 바랄 것도, 이룰 것도, 원하는 것도 없고 그저 해야 할 것들만 남은 것 같다고.
나도 그랬다. 공허하다. 이 허무를 붙잡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당혹감. 이 무용지물의 삶을 붙들고 어디로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참담함. 그 시절의 나는 공허와 허무와 참담 그 사이에서 감각 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감쪽같이 세상이 몰락해 준다면 진심으로 감사할 노릇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으나, 우리는 그럼에도 진심으로 종말을 맞이 하자니 겁이 나고 내 손으로 종말을 촉발할 용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어영부영 시간을 타고 흘러 텅 빈 공간이 의무와 도리로 채워지는 인고의 시간을 거친다.
스물일곱에서 여덟 무렵 세게 앓고 지나가는 홍역 같은 것을 나는 그렇게 부른다. The Late 20s' Crisis. 달관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하고, 성인으로서의 책무는 하나둘씩 과제처럼 쌓여가는 시기.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나를 섣불리 몰아붙이는 인생의 무게를 체감하는 시기. 서른의 부담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이십 대의 나를 벌하는, 눈물 콧물 다 쏟는 그런 시기.
나는 영국에 오기 전, 2년가량을 지독히 앓았다. 학부를 6년 만에 졸업하고 속절없는 백수가 된 날 알았다. 아, 성공한 어른의 삶 따위 내 것인 적 없구나. 나는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시시한 어른이 되는구나. 세상에는 아주 적은 대단한 사람들이 있을 뿐인데 대단한 인물 후보자는 지나치게 많다. 과포화의 세상에서 대다수의 낙오한 위인 경선 탈락자들이 눈물을 머금고 담금질을 견딘다.
아무렴 그래서 석사를 시작할 때 나는 내게 대단한 기대를 할 필요가 없다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학위가 내 인생을 해결해주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학위가 있는 29세가 될 예정일뿐 그것은 어떤 사회적, 경제적 지위와 신분을 약속하지 않는 거라고. 공부 하고 싶었다는 사실 하나만 기억하라고. 냉소적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사실일 것이었고, 사실로 판명 났다. 덕분에 나는 내게 실망하지 않았다. 되려 "짜식, 생각보다 대단한데?" 했을 뿐.
한편 대학원에 입학할 당시 20대 중반이던 T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T와 처음 이야기를 하던 날, T는 내게 자신은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했다. 나는 T에게 내 꿈은 소리 소문 없이 살다 깔끔하게 잊히는 거라 했다. T는 내게 야망이 없다 했고, 나는 T에게 세상을 모른다 했다. 그런 T가 이제 내게 말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건 자신만의 공간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라고. 그것이 얼마나 큰 사치인지 깨닫고 또다시 절망한다. 그런 T는 말했다. 요즘 자꾸 향수에 젖는다고. 걱정 없고 꿈 많던 대학시절이 호시절이었다고. 그런데 지독하게 괴로워도 내 손에 내가 번 돈이 쥐어져 있고, 나만의 삶을 꾸릴 힘이 있으니 오늘이 무너져 내릴 날은 아닌 것 같다고. T는 20대 후반 위기의 시절을 보내며 슬프게도 제 한 몸 책임지려 발악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T가 기특하고, T의 영글어가는 어린 날이 슬프고, 지나간 나의 날이 사무쳐서 말을 아꼈다.
나의 친애하는 친구 P는 박사가 되고 싶었다. 교수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방해받지 않고 꾸려갈 힘이 필요했다. P는 세상을 연민하는 사람이다. 무엇하나 허투루 보지 않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필요한 말만 한다. 지금 P는 본인의 예측과 대척점에 있는 삶을 산다. 평생을 생각해 본 적도 없을 전문직 시험을 준비하며 P는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P와 나는 우리 또래 다른 친구들에 비해 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는데, 그 때문에 우리는 버티는 힘이 꽤 좋았다. 우리는 서로가 무너져 내리려 할 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맷집은 좋잖아? 실컷 때려보라고 하자. 그릇이 깊으면 채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야." P는 요즘 도통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P의 고통을 화젯거리 삼고 싶지 않아 이곳에 많은 말을 남기진 않을 작정이다. 하나 이 전쟁을 치르며 P의 맷집은 쇠약해진다. P가 그랬다. "나는 이제 맷집이란 게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어. 고약한 세상이 원망만스러울 뿐이야." 여전히 사정없이 정을 맞고 있는 P에게 나는 위로가 될 수 없다. 한 때 우리는 함께 아픈 줄 알았는데, P에게 성인이 되는 길이 이리도 가혹할 줄이야. 나는 P에게 모든 것이 최악의 순간으로 치달아도 그 안에 버티고 선 네가 숭고한 거라고 말했다.
어른이 되는 건 시들어가는 걸까. 무던해지는 걸까. 기대를 버리는 일일까. 현실을 마주하는 일일까. 절망의 연속임을 알아도 동요하지 않는 일일까. 그것은 숭고한 일일까.
한 가지 좋은 점은 기대를 버리면 별 게 다 기특해 보인다는 것. T는 우리는 시답잖은 어른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을 시답지 않아도 홀로 서게 해주는 것들에 감사한다. 대단하지 않은 직업과 푼돈이나 다름없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자주 슬퍼도 열심히 의연하다. P는 하루하루 살얼음 위를 걸으면서도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끝나리라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왜 죽을 둥 살 둥 여기서 이런 개고생을 하나 싶다가도 예정에 없던 삶에서 무언가를 이뤄가는 일이 신통하다. 성숙하다는 것은 어쩌면 꿈이라는 말을 뚱딴지라는 말로 치환하고 과한 뚱딴지보다 어제 내린 결정이 최선임을 아는 것인가. 세상에 동그란 네모 따위는 없다는 걸 아는 것인가.
나는 여전히 종이에 슬쩍 베인 손끝을 보며 갖은 호들갑을 떤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타인을 흠씬 욕한다. 그런 미생일 뿐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을 아는 것. 슬프지만 인정하는 일. 동그란 네모를 진짜라고 말하는 꿈을 잃은 어른들에게 홀랑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아는 일. 그럼에도 내게 약을 팔던 어른들을 동정하는 일. 꿈을 잃은 어른들을 마음으로 포옹하는 일. 동그란 네모의 삶을 꿈꾼 것이 불가능을 꿈꾼 것이라는 걸 아는 일. 동그란 네모를 그리던 어린 날의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일. 불가능한 줄을 알면서도 어디엔가 동그란 네모가 있을 수도 있다는 작은 객기를 품고 사는 것. The Late 20s' Crisis를 지나고 나면 삶이 조금은 덜 괴로워지는 일. 그럼에도 속절없이 슬픈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