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리뷰, 스포는 없어요.
이번 주말은 분주했다. 장르가 된 남자, 봉준호의 신작 <미키 17>을 날짜를 세며 기다려왔다. 개봉일인 금요일, 저녁 여섯 시. 평소라면 예외 없이 침대에 널브러져 멍을 때릴 시간이다. 봉준호의 이야기는 금요일 저녁의 기력이 바닥난 집순이도 움직이게 했다.
한국에서 영화가 한 달가량 앞서 개봉한 이유로 지인들의 평이 하나, 둘 감상을 전했다. 그들의 감상평은 대체로 "Hit or Miss, " "Love or Hate." 이리도 극단적으로 갈리는 평가를 본 적이 없었다. 후기를 읽다 보니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 세계에 구제불능의 오점이 남는 것, 그 오점으로 감독에 대한 내 평가를 전면 재편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덜컥 들었다.
부지런을 떨어 영화관에 앉았다. 개봉날인데도 곳곳에 빈자리가 보였다. $118M를 들인 영화의 손익분기점을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저조한 출발이라는 기사가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우려와 설렘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며 영화가 시작됐다.
눈이 쌓인 협곡에서 깨어난 미키. 미키를 내려다보며 해맑게 웃는 티모. "야 미키,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
그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짧지 않은 상영시간 동안 영화는 '유일성'과 '유한성'이라는 인간의 전제조건이 소멸된 미래를 보여준다. 무한재생되는 미키의 이야기를 통해 감독은 '나'와 '타인'의 경계와 관계, 세계와 인간사이의 경계를 훑는다. '훑는다'는 표현 외에 더 좋은 표현을 찾을 수 없다. 영화는 한 작품에서 소화하기에는 큼직하고 묵직한 주제들을 겉만 핥고 빠르게 지나쳐 흐른다.
봉준호 영화답지 않은 결정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밟혔고 중반을 간신히 넘어선 후부터는 "도대체 이 영화의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고민이 시작된다. 한 시간 반 가량을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았다. 봉준호라는 가장 한국적인 고민을 하는 감독에게 미국인의 가죽을 씌워 빚어진 총체적 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영화를 보기 전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다. 그는 워너 브라더스가 판권을 가지고 있던 미키 7을 영화화할 감독을 찾아 헤맸다고 말한다. 그러던 중 평범치 않은 영화를 만드는 봉준호에게까지 연락이 닿았다고. 본인 사유의 산물이 아닌 내러티브에 봉준호의 색깔을 입혀야 하니 발생한 문제일까. 작품은 봉준호 본인도 이 이야기를 본인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에 가깝다.
봉준호는 보여주기에 재능이 있는 감독이다. 전작 기생충에서 그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구조를 시각적으로 각인시켰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주제의식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던 이유 명료하다.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선명하고 살벌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연교의 집으로 가기 위해 하염없는 계단을 오르고 흙탕물이 차오르는 반지하 집으로 끊임없이 내려가는 구도를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그 끊임없는 움직임에서 우르는 우리는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격차를 봤다. 짜파구리에 최고급 채끝살을 넣는 연교 가족과 대왕카스텔라 가게를 말아먹고 몇천 원짜리 한식뷔페에서 거나한 외식을 하는 기우 가족에게서는 익살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봉준호식 사회 비평을 봤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봉준호의 메타포와 상징은 버릴 것 하나 없이 제 자리에서 맡은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미키 17은 이와는 정반대의 궤도로 걷는다. 말이 많다. 영화는 설명으로 시작해 연설을 거쳐 설교로 끝난다. 시작부터 우리는 미키 17이라는 복제된 인간의 조건에 대해 끊이지 않는 설명을 듣는다. 휴먼프린터의 기능과 작동방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정복자와 정복 대상의 관계에 대한 진부하고 거대한 선언을 듣는다. 말이 많아지면 사고의 여지는 줄어들고 관객은 귀를 닫는다. 무엇보다 한국적 맥락에서 쓰인 스크립트가 영어로 직역되며 낳은 이도저도 아닌 기이한 공허는 고통스럽다. 봉준호의 기존 영화에서 보았더라면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았을 대화가 미국이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영어사용자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순간 이 영화는 한국인에게도, 영어권 관객에게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봉준호는 한국인이다. 그의 전작은 대체로 한국사회의 문제를 한국적인 시각으로 그렸다. 본인이 속한 사회의 문제를 깊이 있게 고민하고 내린 결정들이 스크린에 투영되니 그만큼 영화의 완성도가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 사회의 특수적인 문제를 명징하게 그려내면 그 주제의식이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문제에 까지 울림을 전한다. 기생충이 그랬고, 괴물이 그랬다. 봉준호는 한국사회의 계급적 문제, 한국사회의 식민주의적 사대주의적 사회상이 그려낸 문제를 그렸을 뿐인데,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사회의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반면 미키 17은 미국 (혹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영미권) 사회의 문화를 접한 한국인이 막 접하기 시작한 그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이해한 방식을 전시하는 수준에 머문다. 이미 피부로 느끼며 사는 문제를 본인들의 문제를 외국인 감독의 발화로 듣는 관객들이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인 관객은 어떤가. 한국사회의 문제와는 거리가 있는 사회 문제가 버무려진 영화 속에서 인간 조건에 대한 고민은 빛을 잃는다.
영화의 주인공 미키는 인간은 한번 태어나 단 하나의 목숨을 소진하고 나면 죽는다는 불변의 사실을 거스르는 미키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미키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 질문의 본질에 접근하기를 거부하는 영화를 보며 반복되는 질문을 듣는 관객은 영화를 관통하는 이 질문에서 거부감도, 통찰도, 아픔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지루함과 공허만이 극장 공기를 채울 뿐이다. 철학개론과 사회학개론의 기본 개념을 간결하게 훑는 정도의 이야기로는 관객을 설득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