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 전 부터 어머니가 마시던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졸라서 마시기 시작한 것이 나의 커피 사랑의 시작이었다.
한의사셨던 외할아버지께서 당시에 드문 커피를 즐기셨고 그 피를 어머니가 그리고 내가 물려받은 듯 하다.
중학생 때 까지만 해도 당시 집에서 먹는 최고의 커피는 빨간 색 뚜껑의 유리병에 담긴 Taster's Choice(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였다. 인스턴트 커피이지만 당시에 한국에 정식 수입이 안될 때라 남대문 시장 수입제품 판매상인 도깨비상가에 어머니를 따라 가서 몇병씩 사곤 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 한국에서 네슬레사의 테이스터스 초이스가 판매되고 맥심 등 인스턴트 커피가 대세였다. 시간이 흘러 80년대 후반커피숍과 카페를 중심으로 에스프레소 기계가 들어오고 원두를 갈아기계에 덜커덕하고 장착하면 곧이어 '치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진한 에스프레소가 추출되어 내려오고 그 위엔 하얗게 크레마 생기는 새로운 커피가 한국을 휩쓸게 되었다.인스턴트 커피 중심에서 가히 혁명과도 같은 변화였다.
그것을 뜨거운 물에 섞으면 아메리카노 그리고 얼음을 넣으면 한국인의 최애 커피인 일명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메리카노보다 그냥 에스프레소를 즐긴다.
그리고 아이스커피보다는 따뜻한 커피그중엔 에스프레소이다. 그래서 커피 브랜드들이 매장을 본격적으로 오픈 할 때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면 매번 지금 주문하는게 뭔지 아냐는 질문을 점원에게 자주 듣곤 했었다.
사실 유럽에선 커피라고 일컫는 것은 에스프레소 이다.
우유가 들어가는 라떼류는 주로 오전에만 마시고 오후 마시는 커피는 거의 에스프레소이다. 카페에 가서 그냥 커피를 주문하면 에스프레소가 나오는 것이다. 미국에서 물을 타서 마시니 아메리카노가 된 것이겠지만 실제로 유럽과 미국의 커피문화는 상당히 다르다.
주재원 근무로 살던 네델란드에선 라떼 마키아토 커피가 인기였다. 물론 오전 뿐 아니라 오후에도 라떼 마키아토를 마셨다. 하지만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식사가 나오기 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유럽의 특성 상 식전에 음료를 시키는 관행이 있기에이는 어찌보면 식전주 같은 개념이고 식사 후커피는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이태리 등 일부 유럽 국가들의 레스토랑에서는 저녁 식사 후 라떼류의 커피를 주문하면 요리사가 자신의 음식이 맛없다는 항의의 표시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요즘은 네스프레소 머신으로 집이나 사무실에서 손쉽게 신선한 에스프레소를 추출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커피원두를 사다가 갈아서 내려먹는 방법이 유일했다. 대형 에스프레소 머신만큼의 성능은 아니지만 나름 간단한 에스프레소 기계가 있기도 하고 혹은 그냥 드립커피 처럼커피필터(거름종이)에 내려 먹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미니 에스프레소 머신
스타벅스도 기를 펴지 못하는 이태리에선 라바짜, 일리 등과 같은 유명 커피 브랜드들도 있지만 '비알레티(BIALeATTI)'라는 커피포트(주전자)브랜드가 있다.
비알레티는 포트 밑부분에 물을 넣고 그위 스탠 거름망에 원두 커피 가루를 넣고 끓이면 물이 끓게 되면 커피가 포트 윗부분으로 역류되어 커피가 만들어 지는 구조이다.
조그마한 비알레티 주전자로 끓여지는 커피의 양은 미국식의 머그잔에는 택도 없이 부족하다. 비알레티 커피는 한두모금이면 홀짝 마셔지는 에스프레소 전용잔이 딱이다.
다시 비알레티
비알레티로 추출된 커피의 맛은 강한 기압을 이용해 커피를 내리는 대형 에스프레소 머신의 크레마가 풍기는 커피 맛과는 당연히 다르고 거름 용지를 이용해서 커피기름이 걸러 내려진 드립커피의 깔끔하고 깨끗한 맛과도 다르다.
이태리 출장 중에 이런 저런 모양의 비알레티 주전자를 사오기도 했지만 커피러버인 내가 네스프레소 머신을 3대나 사서 사용할 정도로 한동안은 네스프레소의 간단한 사용법과 편의성에 빠져있기도 했었다.
네스프레소 머신
또 최근엔 커피 애호가들의 커피 종착역이라는 드립커피에 흠뻑 빠져서 아침마다 커피 원두를 갈아 신선한 커피향을 맡으며 드립커피를 내리는 즐거움을 만끽 중이기도 하다.
사실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추출된 하얀 커피 크레마는 커피를 마시고 싶게 하는 강한 유혹이기도 하지만 콜레스트롤등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건강에 유해한 커피기름을 걸러내는 것은 거름종이를 사용하는 드립커피이다. 그러기에 드립커피의 맛은 깨끗하고 산뜻하다.
커피의 종착인 드립커피
그런데 갑자기 비알레티가 생각이나서 다시 꺼냈다.
나이를 먹어서 인지 예전에 느꼈던 그 비알레티 커피 맛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형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크레마가 잔뜩 올라간 매혹적인 커피의 맛도 아니고 커피 필터(거름 종이)에 커피 기름이 걸려져 깔끔하고도 산뜻한 드립커피의 맛도 아니다.
다시 꺼내서 즐기는 비알레티 커피에는 뭔가 좀더 꼬릿 꼬릿한 향과 맛이 느껴진다.
어딘가 엉성한 그래서 정감이 가는 비알레티
그리고어딘가 엉성한 이태리 감성의 비알레티 주전자를 만지작 거리는 재미가 있다.
꼬릿한 커피 맛과 함께 귀찮고 느리지만 손으로 쪼물 쪼물 거리면서 커피를 만드는 것이 비알레티 커피 맛의 반을 차지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