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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통장에 천도 없니?

소인 돈이라면 할 말이 없사옵니다...

by 삼각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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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밖에서 친척들을 만나고 온 엄마가 오자마자 내방을 벌컥 열더니, 대뜸 성이 난 목소리로 나한테 질타 같은 질문을 했다.


"너 지금 돈 천이라도 있냐? 네 나이면 통장에 오천은 있어야지, 그동안 뭐했어?! 언제까지 엄마 아빠한테 빌붙어 살래? 아휴 내 팔자야.."


어떤 대답도 할 틈도 없이 그렇게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나중에 알 보고니 나와 동갑인 친척 누구는 벌써 승진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집 부모님의 집을 바꿔줬다나? 그 자랑을 몇 시간 동안 실컷 듣고 온 엄마는 집에만 있는 나를 생각하니 속으로 아주 열불이 났던 거였다.


잔뜩 성이 난 엄마가 나에게 대답할 시간을 줬어도 난 아무 말도 못 했을 것 같다. 정말 이 나이 먹도록 돈 천이 없었고, 나도 내가 지금까지 뭘 했나 싶고, 나도 이제 부모님 시선과 날카로운 잔소리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지만 돈이 없다. 내 안에서 돈에 대한 한탄의 되돌이표는 끝없이 계속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뭐하나. 그 생각을 말해 봤자 무엇하나... 엄마한테 무슨 말을 해도 비참한 느낌이 드는 건 똑같은데. 나가서 살 돈이 없으니 모진 말을 마음에 꾹꾹 눌러 납작하게 만들어 한편에 몰아두고, 방에서 나와 저녁 준비를 하는 엄마를 도와 밥을 차린다.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린다고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지금 그린 이 그림이 당장 돈이 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영영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하루에 6~9시간을 앉아 그림을 그린다. 앞이 보이지 않는 프리랜서이자 그림쟁이는 2년간의 자영업을 끝으로 벌어둔 것 하나 없이 다시 돈 없는 백수인 제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나에게 자신이 없고, 스스로도 내가 너무나 작고 초라하는 걸 알고 있을 때는, 주변에서 던진 작은 돌멩이가 총알처럼 가슴에 날아와 꽂힌다. 당사자인 나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지금의 내가 너무 싫어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아.. 이럴 거면 생명보험이라도 미리 들어놔서 엄마 아빠 먹고 살 돈 좀 하고 죽으면 좋을 텐데. 이런 생각도 했었을 정도로 내 인생은 이제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겨우겨우 그 구렁텅이를 빠져나와 다시 어렵게 일상을 되찾은 건데. 나조차도 내일의 내 상태를 장담할 수 없어 스스로에게 끝없이 "넌 잘하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나는 나대로 천천히 가자." 하며 다독이며 흔들리는 다를 부여잡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뼈를 때리는 그 말 한마디의 파급력은 무시무시해서 마음에 쿵하고 들어와 내 마음의 뿌리를 통째로 흔들어 버린다.


'아.. 역시 난 인생 실패자일 뿐이야. 지금까지 노력해도 이 꼴인데 앞으로 내가 잘 될 수 있을까? 망해버린 도화지를 다시 어떻게 되돌리겠어.'


누군가가 부모님과 트러블이 있을 때면 상담을 해준다고 "부모님과 트러블에는 독립이 답이에요."라고 한다. 알지. 너무 잘 알지만 독립하기에는 정말 돈이 없다. 각종 부동산 어플을 뒤지고 부동산에 찾아가 보기도 했는데 독립을 하려면 보증금 100~500 정도에 월세(40~50만 원)와 생활비(전기, 수도, 가스비, 관리비, 인터넷, 핸드폰비, 생필품, 기본 식비)를 충당하려면 한 달에 적어도 백만 원 정도의 수입이 있어야 한다. 만약 지금 수중에 500만 원이 있다고 해서 홧김에 덜컥 나간다고 해도, 그 이후에 버는 돈은 다 생계유지비로 나가는 거니 당연 저축으로 모으는 돈은 엄청 적어진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백수 아닌가? 당연히 독립은 못하고 한 집안에 부대끼며 사니 트러블은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가증되고 있다. 더 이상 가다가는 정말 나도 엄마도 아빠도 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내가 내린 결정은 지금 당장 독립을 못하니, 우선은 부모님 눈에 안 보이는 곳에 떨어져 있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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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돈이 조금 들어도 그림 그릴 장비를 챙겨 무조건 집 밖으로 나갔다. 주로 공공 도서관에서 그림을 그렸다.(정말 도서관이 최고입니다. 와이파이도 되고 간식 ok, 자리, 물 다 공짜예요.) 점심은 도서관 매점에서 간단히 먹고, 저녁이 조금 지난 저녁 시간에 들어와 부모님을 피해 밥을 혼자 차려먹었다. 공공 도서관이 휴관이거나 시험기간이라 만석인 날에는 근처 카페나 맥도널드 2층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집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 한 자리를 정해 가만히 그 자리에만 있어야 하니 몸은 불편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집보다 편했다. 엄마도 내가 무슨 이유가 되었든 집에서 나가서 늦게 들어오니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졌다. (그렇게 도서관과 카페를 돌아다니며 그리고 쓴 이야기가 브런치에 올렸다가 책이 된 '오늘도 집순이로 알차게 살았습니다.'이다. 사람 오래 살고 볼 일..)


내가 나를 아무리 다독여도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의 말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제발 상처 받는 말은 그만해달라고 해도 '다 나를 위한 말, 걱정'으로 포장되어 오히려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버릇없는 년'이 되고 만다. 아직도 돈도 없고 독립도 못한 소인은 마님께 돈으로는 드릴 말씀이 없으니..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눈치 빠르게 반질반질 집 청소를 깔끔히 해두고 마님 눈에 안 띄는 게 상책인 것 같다.


어쩔 때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가까운 사이에 더 필요하다.




종종 살만한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은 그런 어느 날이 있어요.

그런 날들의 소소한 단편을 올립니다.





브런치에서 연제한 《살 만한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은》이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책의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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