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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피디 Dec 02. 2022

<브이 포 벤데타>, 만화와 영화

승리하는 피의 복수

만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로마 숫자에서 5를 뜻하는 V는 알파벳 브이(V)와 연결된다승리의 빅토리(Victory)와 피의 복수를 의미하는 벤데타(Vendetta)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처럼 얽혀있다


만화 <브이 포 벤데타>는 1982년에 영국의 워리어 잡지에 연재를 시작했다. 1997년 영국이 전체주의로 변해버린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브이가 등장해 전체주의 정부에 맞서는 이야기는 영웅의 복수극이 결합한 혁명에 독자를 동참하게 한다. 


거대한 자본의 영화계가 원작으로 선택한다면 대부분의 저작자는 기뻐한다. 영화계가 사들이는 판권이 거액이기도 하지만, 영화는 동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반드시 영화화를 반기는 것은 아니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수많은 제안에도 아직 영화화를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화를 반대했던 원작자 앨런 무어는 2005년 개봉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원작의 바탕인 무정부주의가 사라졌다고 지적했고 캐릭터들이 단조로워지고 입체감이 사라진 것에도 불쾌한 심리를 드러냈다. 

브이 포 벤데타 30주년 기념 한국어판 (시공사), 1988년 발행 이슈1

만화 <브이 포 벤데타>는 1982년 처음 연재를 시작했지만, 중간에 멈추었다가 1989년까지 연재되었다. 연재라는 속성 때문에 초기 에피소드가 자리 잡을 때까지 톤이 변화하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 진행되는 만큼 견고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설정에 충실하게 전개된다. 전체주의 정부와 브이가 보여주는 정의의 해석과 묘사는 대체 누가 선이고 악인가 분명하지 않다. 입체적이고 복잡한 인물들에 독자도 주인공을 사랑해야 할지, 악당을 미워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아니, 누가 더 못된 악당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브이 포 벤데타>의 1997년처럼, 우리에게도 정부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었고, 전 국민을 향해 같은 신념과 단결을 촉구하던 시대가 있었다. 대중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관의 이름이 ‘눈’, ‘귀’, ‘입’인 점이 기발하다. 그러나 국어로는 그 느낌이 살지 않아 번뇌에 시달렸을 번역가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영어에 능숙하다면 대사와 설정의 언어유희와 연극 포스터를 가장해 배경에 숨어있는 분위기 등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도서의 후반부 스토리 작가인 앨런 무어가 <브이 포 벤데타>의 탄생을 회고하는 글이 있다. 그림 작가 데이비드 로이드와 주거나 받거니 한 아이디어의 조각들이 어느 순간 결합하는 <브이 포 벤데타>의 과정을 들려준다. 폭발적으로 생산력을 발휘하는 두 사람의 작업 과정은 소위 ‘되는’ 프로젝트의 전형을 보여준다. 작품이 작가가 설계한 것보다 크게 성장하고, 대중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될 때의 두려움과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성공한 작품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회와 문화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된다. 

영화와 드라마는 인기 있는 소설, 만화를 원작으로 선택하면서 원작의 팬들을 만족시키면서도, 영화나 드라마로서 정체성을 지키는 방법을 배웠다. 연재 중인 만화나 소설의 진행이 늦어져 억지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설정만을 차용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펼치기도 했다. 


영화는 제한된 시간 동안 완성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고, 볼거리로 관객을 압도해야 하기에, 독자가 원하는 시간만큼 페이지에 머무는 만화의 디테일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사랑에 빠진 낭만적인 브이와 성장하는 여인 이비에 초점을 맞추며 대중영화로 머무는 영리한 선택을 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앞으로 전개될 1년을 다루겠다는 선전포고로 시작한다. 정해진 2시간에 관객에게 완결된 이야기와 만족을 주어야 하는 영화의 특성상, 만화의 시각적인 설정과 요소는 활용하되 다양한 캐릭터의 입체감과 심리적 깊이는 타협했다. 마스크는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초반부터 액션을 전개한다.

원작자는 영화에 혹평을 쏟아부었지만, 영화에서 설득력 있게 수정된 점도 있다. 영화는 짧은 시간 동안 살아있는 배우를 빌려 전달되기에 영화만의 개연성이 필요하다. 만화에서 열여섯 순진하기만 했던 소녀 이비가 1년 만에 성숙하고 굳은 가치관을 가진 성인이 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이비가 브이를 만나고 습득한 지식과 경험은 놀랍고 충격적이지만, 그것을 소화해 자신의 신념으로 만드는 데 1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영화에서 이비를 직장인으로 설정하면서 이비의 성장과 변화는 훨씬 설득력을 갖는다.


단시간 대중에게 소비되는 영화의 특성상 브이와 이비의 관계 역시 영화적 개연성에 맞춰 수정되었다. 영화에서 브이는 사랑에 빠진 혁명가이고, 이비는 혁명가와 사랑에 빠진 여인이다. 지나치게 아름답고 허무한 컨셉이지만 2시간 남짓 펼쳐지는 화려한 액션과 속도, 낭만에 관객은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은 없다.


11월 5일은 1605년 화약 음모 사건을 주동한 가이 포크스가 체포된 날이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는 이날을 중심으로 브이의 복수와 혁명이 전개된다. 2019년 11월 5일 BBC 뉴스에서는 <브이 포 벤데타>를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 100에 선정했다.


만화에 간혹 ‘영화 같다’는 평을 칭찬처럼 덧붙이는 표현을 보곤 한다. 스토리를 매개로 전개되는 시각적인 매체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어떤 매체가 상위이고 하위라는 생각은 불편하다. 만화 <브이 포 벤데타>에는 캐릭터의 섬세한 묘사와 정교한 설정, 스토리 전개, 홈통으로 연출되는 극적인 브이의 액션 등 스토리와 그림이 결합해 발산하는 매력이 가득하다. <왓치맨>과 더불어 만화의 가치를 확인하기에 아주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테러리스트를 조롱하는 의미였던 가이 포크스 가면은 <브이 포 벤데타>에서 브이의 마스크로 유명해졌고, 독재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전 세계 시위에 등장하기도 한다. 사진 아흐메드 자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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