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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나무 May 01. 2024

자발적 퇴사, 365일 빨간 날!

퇴사 후 첫 월요일, 너도바람꽃을 만나다.

 

  3월 4일 개학일이다. 전국 모든 학교들이 일 년 중에 제일 바쁜 날이다.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설렘과 두려운 마음을 안고 새 출발을 하는 날이다. 3월 첫날이 얼마나 분주하고 정신없는지, 충분히 경험해서 잘 안다. 학교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눈길을 마주하며 이름도 불러주고 첫인사를 나눌 시간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문구처럼 월요일이 휴무인 남편을 따라 9시에 집을 나선다. 이름도 거창하게 야생화 출사이다. 예봉산 자락의 세정사계곡이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있는 3월 초라 야생화가 있을까 싶다. 물이 흐르는 계곡 주변의 거친 돌길을 조심조심 내딛는다. 한참을 올라가 드디어 야생화를 만났다. 콩나물 줄기보다도 가냘픈 줄기 위에 여리고 투명한 하얀 꽃이 올라와 있다. 에게, 겨우 손가락크기만 하다. 너도바람꽃이란다. 이름도 재미있다. 저 작은 게 그냥 꽃 피운 게 아니리라. 땅속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힘을 응집하고 있다가 때를 따라 싹을 틔운 것이다. 땅에 바싹 붙어서 차가운 땅을 뚫고, 눈을 헤집고 올라온 작은 생명이다. 강인한 결기가 느껴진다. 참 대견하고 기특하다.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와 도전거리들에 응전하면서 오늘을 만들어온 나를 보는 듯하다.     


 귀염귀염하고 작지만 강한 꽃, 너도바람꽃을 한참을 바라본다. 

여러 각도로, 가장 낮은 자세로 사진을 여러 컷 찍는다. 이 평일 밝은 대낮에 봄기운 역력한 숲 속에 와 있는 나 자신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제와 같은 햇살이건만, 낮시간에 산속에서 만난 햇살은 느낌이 다르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마음은 복합적인 색깔을 띠고 있다.     


 35년 직장 경력을 마무리하며 2024년 2월 29일 자로 자발적 퇴사를 했다. 이른바 명예로운 퇴임이다. 정년까지 4년을 남겨둔 시점이다. 한 가지 일을 35년 동안 계속한다는 것, 스스로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 수고 많았다고 자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집안일, 아이들 양육, 그리고 직장일을 병행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시간들,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도 많았지만 감사함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 기쁘다. 그 긴 시간들 속에 들어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잠시 뒤로 밀쳐두려고 한다. 일하는 사람으로 살 때는 일주일이 확실하게 둘로 나누어진 시간표를 갖고 있었다. 평일인 월요일에서 금요일, 그리고 주말이자 빨간 날인 토요일과 일요일이다. 지금 나는 365일 빨간 날에 새롭게 나를 맞추어가려고 한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하다. 한편으로는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다.      


  아침에 바쁘게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니, 출근할 곳이 없다는 것이 왠지 허전하기도 하다. 내가 버리고 나왔는데, 버림받은 것 같은 마음, 대체 이 마음은 뭐지?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이렇게 놀아도 괜찮은 건가?      


 아무런 울타리 없이 넓은 광장에 홀로 서 있는 것 같다. 그 울타리는 나를 든든하고 안전하게 보호하고 나의 일부분이 되어주었다. 동시에 나를 가두고 규정짓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울타리 안에서 좁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답답함이 늘 있었다. 이젠 내 이름 뒤에 붙은 직함도 떼고, 든든한 피난처도 없다.

‘교사’,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공인이 아니라 일반인이자 자연인이 되었다. 엄청 자유롭고 다 좋을 것 같지만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시원 섭섭, 복잡 미묘하다’ 고 해야 할까?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끈을 갑자기 놓아버린 느낌이다. 중간중간 시간을 보면서 ‘지금은 1교시네, 급식시간이겠네, 퇴근할 때가 되었네.’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올라온다. 생각의 방향은 아직도 직장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스스로도 놀란다. 교사라는 하나의 정체성의 외피가 내 피부가 된 듯하다. 온몸과 마음에 각인된 오래된 습관의 위력이다.     

 

‘괜찮아, 누구나 처음은 낯설고 두렵기까지 한 거야.’

‘넌 좀 놀아도 괜찮아.’

‘넌 이제 자유로운 프리랜서가 된 거야.’ 

출정식을 앞둔 사람처럼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계속 되뇌어준다. 일하는 사람을 잠깐 내려놓고 즐기는 사람으로 나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시간들이 내 앞에 있다. 복합적인 기분의 종합세트 같은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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