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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나무 May 15. 2024

‘도서관 유목민’을 아시나요?

퇴직 후 도서관으로 출근하다


“일 그만 뒀다며? 이제 뭐 할 거야?”

“무계획이 계획이야. 계획 없이 한 번 살아보려고. 

뭐, 하고 싶은 것 하고, 여행도 다니고, 놀기도 해야지.”

가까운 지인들의 물음에 웃으며 대충 얼버무리듯 대답한다. 답변이 좀 옹색하다.

열심히 일했으니 놀거나 쉬어도 괜찮은데, 마냥 편하지 않은 마음이 한구석에 구겨져 있다. 


「도서관 저자학교 참여자 모집」

작가가 되고 싶은 시민을 위한 수준별, 장르별 글쓰기 및 책 출판 프로젝트


  2월에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책을 검색하다 공지를 보자마자 내 눈이 반짝였다.

작가가 되고 싶은 시민? 바로 난데?

‘와, 대박이다. 퇴사하면 오전이라도 참여할 수 있겠어!’

오래 마음 깊이 묻어온 작가의 꿈, 이제는 꺼내서 펼쳐도 되지 않을까?

충분한 시간이 생겼으니 온전히 뛰어들어도 되지 않을까?

수강료도 없고 강사진도 대단할 것이다. 장소도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이다. 수요일부터 금요일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 재빨리, 늦지 않게 신청했다. 


선착순이라 금방 마감되고, 대기자마저도 마감되기 쉬운 걸 나중에 알았다. 이 대단한 프로그램은 인천시교육청이 의욕적으로 진행하는 사업인 「읽ㆍ걷ㆍ쓰」 사업 중 하나였다. 작년에도 저자되기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책들을 출간했고, 도서관 입구에는 자랑하듯이 ‘읽ㆍ걷ㆍ쓰 저가 서가’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인천중앙도서관 서가


  “읽고, 걷고, 쓰다”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어서 반가운 마음도 든다. 책 읽기, 메모하거나 일상을 기록하기, 둘레길 걷기나 산행, 맨발 걷기 등은 내 일상을 즐거움으로 채우는 것들이다. 교육청의 주요 활동으로 강조하기 전부터 내가 일상적으로 꾸준히 하고 있다. 


  신청한 프로그램 수강 대상자가 되었다는 도서관의 안내 문자를 받고부터 나는 학교대신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새로운 도서관학교다. 이제 나는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배우는 학생이다. 그래서 업무상의 스트레스가 없다. 물론 매일 아침 이른 시간부터 출근하는 것도 아니다. 의무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 출근이라 마음이 가볍고 즐겁다. 내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것에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은퇴자가 누릴 수 있는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오늘 어디가?”

“응, 도서관.”

아침을 챙겨 먹고 외출 준비를 서두르는 나를 보고 남편이 물어본다. 나는 미세하게 어깨에 힘을 주고 미소와 함께 답을 한다. 


  설렘과 기대를 안고 초급 글쓰기 수업에 늦지 않게 들어갔다. 첫 참여라 낯설었다. 둘러보니 앉아 있는 사람은 2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했다. 첫 모임이라 각자 소개를 하고, 글쓰기 프로그램에 오게 된 까닭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20명 가까운 참가자들이 다양한 삶의 배경과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저는 현재 육아휴직 중으로 아빠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젊고 훈훈한 이미지를 가진 30대 남자분이다. 또 다른 젊은 남자 참가자는 부동산 관련 유튜브를 운영하는데, 글쓰기가 필요해서 참여했다고 한다. 

 “저는 중국 사람입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에 산 지 7년 되었습니다. 한글을 배우는 중이고 한국어 글쓰기에 도전하려고 왔어요.” 


  가장 연장자처럼 보이는 분이 자기소개를 했다. 86세였다. 우리 엄마와 비슷한 연배로 그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건강한 몸으로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는 열정과 의지는 젊은이 못지 않았다. 힘든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 내력을 듣고 있자니 저절로 숙연해진다. 더 놀라운 것은 배움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평생 배움을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를 마치지 못하여 중년 이후에 성인 배움학교를 거쳐 05학번으로 방송통신대학교까지 졸업하시고, 동기 모임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과 함께 도서관 글쓰기 프로그램을 신청하여 제일 먼저 와서 열심히 배우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아유, 나는 글을 못 써서...”

이런 겸손한 웃음 뒤에 엄청난 내공이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합평할 때 글을 보니 속으로 감탄의 탄성이 절로 나온다. “와, 대단하다.” 


  나는 첫 도전이지만, 여러 도서관을 잘 활용하고 있는 ‘도서관 유목민’들을 여럿 만났다. 유목민은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다. 촉을 밝혀 풀을 찾아 이곳저곳 탐색하고, 누구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옮겨 다녀야 한다. 도서관 유목민도 수시로 관련 홈페이지를 드나들며 공지 사항을 확인하고 신청 시간에 늦지 않게 바로 신청해야 한다. 인기 강좌는 수 초 만에 마감되기도 한다. 대부분 온라인으로 신청하기 때문에 인터넷 사용이 능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접근 기회조차 주어지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현대는 정보전, 속도전이라고 했던가? 배움에 대한 의지와 열정만 있으면 무료이거나 아주 저렴한 비용만 지불하고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참 많다는 걸 새롭게 알았다. 시간을 내어 찾아보니 도서관, 구청의 평생학습관, 근로자복지관, 여성회관, 스포츠센터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개설되고 있었다. 모두에게 열린 아름다운 복지를 실현하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음, 나도 이제 도서관 유목민에 합류한 셈인가?’ 


“은퇴는 아마도 가장 풍요로운 시기이며, 우리 자신과 가장 닮았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 시기는 개발하지 않은 채 그냥 두기에는 어리석을 정도로 너무나 탁월한 자산을 형성한다.” 

- 베르나르 올리비에 <떠나든, 머물든>

어디로 향하든@고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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