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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Dec 14. 2024

대재앙 휩쓴 뒤, 더 로드


캘리포니아의 겨울은 우기다.

하이 시에라에는 비 대신 눈이 쌓여간다.

영하로 떨어진 한국은 난데없는 비상계엄령 여파로 바짝 얼어붙었다.

시시각각 요동치는 정국.

설핏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강박적으로 챙기게 되는 뉴스.

급변사태를 하루하루 불안하게 지켜보며 탄핵국면을 또다시 겪어내야 하는 국민들의 참담한 심사 아랑곳없이 계파갈등을 노정시키는 국회의원들의 작태라니.

겨울비 하루종일 소리없이 내리고 벽난로 앞 고양이는 고개 사려튼채 잠들어 있다.

이 아늑한 평온감을 누리기 어렵게 만드는 바깥 소식, 여야 정치권의 작태가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서 차라리 책을 펼쳐 들기로 했다.

소년이 온다를 그렇게 읽었고 이번엔 암울하고 황막하고 혹독한 더 로드를 집어 들었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총체적 난국만큼이나 가슴 무겁게 하고 답답하게 하는 소설 속의 비극적 상황이 서로 엇갈렸다가 맞부딪혔다가 한다.

재만 남은 절망적 상황에서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야 하는 소설 속 세상과, 야수의 먹잇감이 되지 않고 짓밟혀 죽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달려야 하는, 곳곳에 생존을 위협하는 공격이 도처에서 기다리는 현재의 세상과 무에 다른가.

소설 <더 로드> 속의 남자.

대재앙이 휩쓸고 간 뒤 이 세상에 살아남은 아들과 아버지다.

어쩌면 곁에 어린 아들이 있었기에, 아이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절망할 수 없었고 원칙과 양심과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아버지는 아니었을까.

아이가 없었다면 절망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지켜야 할 소중한 미래, 어린 아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세상의 전부였다.

도시는 불타버렸고 인류와 생명체들은 거의 다 멸종했다.   

세상은 온통 잿빛이다.

불에 탄 세상은 재로 뒤덮였으며 하늘은 재에 가려 태양도 보이지 않는다.

한낮마 침침한 채 뿌연 빛만이 떠돌아다녔다.

어느 날 아이를 낚아채 위협하는 남자를 총으로 죽인 아버지는 자신들 말고는 모두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목적은 오직 하나. 그 나쁜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지켜는 일이었다.

“하느님이 나한테 시킨 일이야. 너한테 손대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죽일 거야, 알아들었니?”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그래,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이야”

“그리고 앞으로도요?”

“그래, 앞으로도”

그는 아이 앞에서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라고. 그것은 약속이자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아이는 인간 본래의 순수성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았다.

남자 역시 아들을 위해서는 누구든 죽이지만, 아들의 요구에 따라 노인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도둑을 용서해 줄 정도의 인간성은 남아 있었다.

실제로 그런 막장 세상에서는 좋은 이가 드물다기보다 아예 찾아보기 어렵다.

세상은 불타 잿더미가 되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진작에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이의 엄마는 많은 이들이 자살을 선택한다며 자기들도 그렇게 하자고 남편을 조른다.

이대로 버티다 결국은 잡혀서 몹쓸 일을 당하고 잡아먹힐 뿐이니 아이와 함께 죽자고 한다.

그러나 남편이 끝내 외면하자 여자는 남편과 아들을 두고 홀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살아남은 자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만도 못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문명이 파괴된 야만의 시대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ㅡ남자는 깜깜한 숲에서 잠을 깼다.



The Road는 미국 작가 코맥 매카시 (Cormac McCarthy)의 소설이다.

이 소설로 2007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65년 첫 소설 <과수원지기>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1985년작 <핏빛 자오선>이 <타임>지에서 뽑은 '100대 영문소설'로도 선정되었다.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라는데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쓴 소설가라는 것 외엔 아는 것도, 읽은 책도 없다.

겨울비 출출 내리는 날씨라 밖에 나가 야드 손질하기도 어렵다.

잔디밭 민들레도 뽑아줘야 하고 웃자란 정원수도 동그스럼 보기 좋게 전지해 줘야 하나 비에 묶여 하릴없이 앉아있다.

그래서 읽을만한 책을 꺼냈다.

하늘이 쪼개진 듯 강렬한 섬광이 번쩍였고 땅이 흔들렸으며 화염이 치솟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은 더미로 변했다.

세상에 종말이 왔다.

모든 게 재로 화한 세상에서는 인간의 적은 인간.

식량은 바닥났고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워하며 보이는 족족 죽이거나 주검이 다.

남자와 어린 아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남쪽 바다로 가고 있다.

그곳이 무엇을 약속하는 땅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

더 로드는 절망적인 잿빛 황무지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길을 나선 남자와 아들의 이야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이 지구를 덮쳐 온 세상을 암흑으로 만들었다.

보이는 공포보다 보이지 않은 공포, 상상의 공포가 더 끔찍하고 섬뜩하다.

온통 잿빛인 세상.

색깔을 지우고, 시간을 지우고, 인간의 이름을 지우고, 관계와 만남을 지우고, 인간성을 지운 세상이 도래했다.

"시계들은 1:17에서 멈추었다."

식량과 물조차 바닥이 났다.

최소한의 인간 경계마저 무너졌다. 오직 생존만을 위해 굶주린 인간들은 저마다 야수가 되었다.

그들은 가차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마침내 사람까지 잡아먹는다.  

사람들은 미쳐버렸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음보다 더 비참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으니, 오직 생존을 위해 다른 인간의 피를 마신다.

지옥이란 악행 끝에 죽은 자들의 세상이 아니라, 이렇게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들이 겪는 세상이 바로 지옥도를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는 죽는 것도 사치야."

그럼에도 남자는 소년에게 줄기차게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것만이 미래를 기약하는 희망의 불씨.

하지만 현실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목적했던 남쪽 바닷가에 도착하나 거기서 아버지는 끝내 눈을 감고 만다.

혼자 남겨진 아이 앞에 젊은 남녀와 그들의 자녀와 개로 구성된 가족이 다가온다.

아들의 꿈이 또래의 아이를 만나는 것인데, 이 일행에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두 명이나 있다.

그는 아이에게 함께 있던 사람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아빠가 죽었다는 말에 그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아이가 모르겠다고 하자 자기와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아이는 이 뜻밖의 제안에 이렇게 묻는다.

“아저씨는 좋은 사람인가요?”

아이의 질문에 어른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아빠를 잃고 혼자가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여기서 아빠 시신과 함께 있든지, 우리 가족과 함께 가든지.  

이런 제안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당연히 소년은 불안하다.

그래서 불을 운반하세요? 아이들은 있나요? 사람을 잡아먹지 않지요? 꼼꼼히 묻는다.

끝으로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알 수 없지. 그냥 믿을 수밖에 없지.”

아저씨의 짧은 대답은 아이에게 신뢰를 주었다. 그래서 아이는 함께 가도 되느냐고 묻는다.

떠나기 전 아버지와 작별하러 갔을 때 아이는 아버지의 시신이 담요에 싸여 있는 걸 보았다.

아이가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오랫동안 울도록 기다려 준,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을 신이 보냈던가.

평소 아버지가 말해온 ‘또 다른 좋은 사람들’을 만나 아이는 길 위의 여정을 계속하게 된다.

더 로드의 미덕은 비록 세상이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거 아닐지.

소설 원문 대화체에는 문장부호인 "..."가 일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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