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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4. 2024

시옷서점의 특별한 시인 부부

호기심은 인간의 기본 속성이자 보편적 욕구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불현듯 더 알고자 탐색해 보고 싶어지면서 흥미가 생긴다. 이때 동시에 열정이 일어난다. 모든 호기심은 이와 같이 흥미와 열정을 수반한다. 인간 특유의 열정적 호기심은 실제로 인류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나이 들수록 매사에 무관심해지거나 심드렁해지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왕성한 호기심을 사랑해 마지않는 자신. 그렇다고 내 호기심, 사는 데 아무 도움도 못 되는 알량한 수준의 호기심이긴 하다. 순전히 제멋에 취한 호기심을 슬쩍 과대포장하려 함인가, 천만에다. 단지 호기심이 반짝 고개 치켜들 적마다 눈빛이 반짝댄다는 게 느껴져서이다. 호기심이 있기에 세상살이가 재미지고 하루하루 지루할 새가 없어서다. 다만 정보화 시대에 도처에 깔려있는 위험한 판도라 상자만은 호기심 피어나도 열지는 말 일이다.


김신숙 시인을 처음 만난 곳은 시청 꿈나무기자단 발대식에서다. 행사 말미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독서의 중요성과 글쓰기에 대한 강의를 한 그녀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김시인은 통상 시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말수가 적기 보다 시원시원한 언변에다 까칠하기는커녕 활달하고 붙임성 좋았다. 하도 씩씩하고 소탈해 이편에서 외려 어리둥절할 정도인데다 예민하게 야윈 시인들 체형과도 사뭇 거리가 떴다.


헤어지기 앞서 시인으로부터 동시집을 한 권 받았다. 시집 속지에 사인을 하면서 전화번호와 함께 시옷서점이라 썼다. 고개를 갸웃대자 부군도 시인으로 둘이 책방을 하는데 시집 전문 서점이라고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해줬다. 저녁에 그녀가 준 <열두 살 해녀>를 펼쳤다. "시를 쓰는 일은 깊은 밤 아무도 모르게 바다를 건너가, 수평선을 반듯하게 펼치고 오는 일"이란 글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반짝, 반딧불이 빛 같은 호기심이란 불빛이 켜졌다.  

·····

반듯해야지


하늘하고

바다를

나눈 것처럼


푸른 수평선을 바라 봐

반듯하지


빗창처럼

반듯하게 몸을 세워야 해


-해녀 걸음- 부분


열두 살에 해녀가 된 시인의 어머니 이야기를 채록하여 동시로 썼다. 해녀 어머니와 시인 딸,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기억의 전승 시편들이다. 생사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며 파도와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해녀들은 '빗창처럼 반듯하게 몸을 세워야'함을 지혜로 체득한다. 동시라서 이기도 하겠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녀의 따뜻한 심성이, 반듯한 정신이 보였다.


이 동시집은 '일하는 할망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라 했다. 앞으로 한라산에서 약초를 캔 할머니, 조각보만 한 밭에서 여러 작물을 길러 낸 할머니, 소와 말을 기른 할머니가 계속 등장할 거라고 하였다. 제주여민회에서 4·3 생존 희생자 할머니 구술 채록을 몇 년째 하고 있다는 김 시인. 그녀는 매일을 바쁘게 열심 내어 성실히 사는 워킹맘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라면 마다않고 청소년 자원봉사자로, 문화기획자로 뛰어다닌다. 독서논술교사이며 작은 책방 운영자로 억척스레, 그럼에도 즐거이 일하는 김시인. 팟캐스트 '시활짝'을 진행하는 김시인은 무엇에도 거칠 것 없고 스스럼도 없었으며 재치 있고도 유쾌했다.


서귀포에서 태어나 서귀포여고 문예부 ‘볕발’을 비롯해 대학 문학 동아리 '신세대'를 거쳐 현재 제주작가회의에 속해있는 그녀다. <시침핀>이라는 시집을 낸 바 있는 김 시인은 2015년 문예지 <발견>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2017년 시집을 펴냈다.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속에는 아름다운 서귀포 풍경 이면에 감추어진 군상들의 불행한 삶이 주로 담겨있다. 항구도시이자 화려한 관광도시의 그늘에 찌든 영혼들의 상처로 얼룩진 이야기들. '열다섯 살의 차도르' 와 '응달' 속 여자아이는 섬찟하기까지 하다. 마치 딴 나라 이야기같이 음습한 뒷골목과 시대의 비극들을 다루는 그녀.

·····

우리가 가끔 울 적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뜯어 울 적에

울컥이는 울음이 부상병처럼 지혈될 적에

묻는다 억겁의 인연으로 둘둘 말린

너는 어디에서 왔니?


-오래전 나무가 나에게- 부분


종이를 통해 나무를 생각하고, 이 슬픔의 근원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시다. 아마존 열대우림 어느 귀퉁이가 속절없이 날마다 무너져 내리는 작금의 현실이 시인은 정떨어지게 싫다. 주저앉아 울음으로나 대치해야 하는 무력감도 싫다. 하여 시로 울컥 울컥 내지르나 보다. 시를 훑다 보니 점점 더 오리무중, 그녀의 시 세계를 구축한 원형질은 뭘까가 궁금해졌다. 흔히들 '시적'이란 표현을 자주 쓴다. 보통 시적 감수성, 시적 감흥 같은 건 대개 말랑말랑 연하고 부드럽고 고요한 서정적 정취와 짝지워진다.


한편, 날카로운 감각으로 직시한 참담스러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시를 쓰는 그녀. 은유, 상징, 비유를 통해 민감한 이슈를 돌려 말하나,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치열한 시정신으로 중무장한 그녀인데 저 환한 표정은? 동시대의 사회적 이슈, 즉 현실참여적 시를 쓴다는 건 좀 더 뒤에 안 일이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와 내적 문제에 천착해온 그녀라는 게 문득 버거워졌다. 괄호 밖으로 밀쳐낸 사회적 약자·소수자와 연대하는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론 '다름'에서 오는 이질감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기에. 모든 사람마다 다, 보는 각도에 따라 제각기 면면이 다른 다면체임을 인정하고 보면 무릇 수용되고도 남지만.


김시인의 동시집을 접하고 들었던 호기심에 더해 점점 확대되는 궁금증은 왜 시옷서점일까,였다. 호기심이 이번엔 초저녁 개밥바라기 별빛같이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시옷이 무슨 의미지? 한글 자음인 ㄱㄴㄷㄹ ㅁ ㅂ ㅅ의 그 시옷인가? 시집 전문 서점이라 시의 옷인가? 시의 집이라면 몰라도 옷이 대체 무슨 상관?  물음표가 머리에서 제멋대로 떠다녔다. 책방지기를 직접 만나 명쾌한 답변을 듣고 싶었다. 심사숙고하고 자시고 할 새도 없이 급한 성격대로 즉각 인터뷰 섭외에 들어갔다.

지난해 연초부터 올봄까지 서귀포 문화예술인 탐방 기사를 쓰면서 거의 연세 높은 분들을 모셨다. 평균연령대가 여든일 정도로 원로급이 대부분이었다. 여름호만은 정형화되다시피 한 틀을 깨는 작업, 젊은 피 수혈이라는 얼마쯤의 파격도 허용될 거 같았다. 스스로도 부담감이 한결 경감됐다. 본래 탐방 전날 약속 장소를 미리 답사하곤 했는데 이번엔 그 작업도 생략했다. 물론 한동네나 마찬가지인 중앙로에 위치해 있어 하영 올레길을 걷거나 솜반천 오가며 그 골목길 지났을 법도 하였다. 지도만 슬쩍 보고 시청 앞에서 약속 시간 십분 전에 출발했다.


시옷서점 위치는 서귀포시 중앙로 153번 길 5이므로 오분 안팎 거리다. 그러나 웬걸! 노블레스 아파트와 서귀북초등학교 중간 골목을 아무리 헤집고 다녀도 서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폰으로 검색을 하다 하다 주변 가게에 들어가 물어봤지만 전부 모르겠노라 고개 흔든다. 약속시간이 지나자 등에서 땀이 났다. 급기야 전화를 걸려고 번호를 찾았더니 전번조차 안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연결이 되어 허둥지둥 서점에 도착했을 때는 약속 시간이 삼십분 너머 초과됐다.


젊은이들과 약속을 해놓고 예의가 아닌 이런 실수를 다 하다니. 민망감을 덜려고 냉수 청해 땀을 식히며 그제서야 현택훈 시인과 인사를 나눴다. 선한 소년처럼 무한 착해 보이는 현시인. 천상 시인 아니면 무얼 해낼 수 있을까 싶게 식물성에 가까운 그. 고요한 서정을 품은 시인이라 들었던 바와 달리, 두점박이사슴벌레와 숨비기 꽃을 아는 섬세한 동시작가만은 그 또한 아니었다. 그는 밝은 곳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시인이기 보다, 소외된 채 잊혀져가는 것들에 관한 시 쓰기를 의무감으로 여기며 추구하는 시인이고자 했다. 부창부수, 부부의 연이 닿은 건 당연지사였다.


현시인은 1974년 제주 출생으로 목원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제주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2007년 <시와 정신>을 통해 등단하기 전 이미 2006년 <지용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제1회 4·3평화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동시집 <두점박이사슴벌레 집에 가면>, 음악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 산문집 <제주어 마음사전>,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 <제주 북쪽>을 펴냈다.

····

개구리는 비 맞으며 노래하고,

달팽이는 비 오는 날 이사하고,

지렁이는 빗물에 목욕한다.


-비 오는 날- 부분


그로부터 받은 첫 동시집을 펼쳐들었다. <두점박이사슴벌레 집에 가면>은 멸종 위기에 처한 곶자왈의 두점박이사슴벌레를 표제로 한 동시집이다. "어렸을 때 놀았던 풀숲에 있는 식물이나 곤충은 모두 이름이 있다. 그 이름부터 먼저 불러준 다음에야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나랑 놀아주면 좋겠다. 작년 여름에 사귄 두점박이사슴벌레 집에 또 놀러 가야지.” 현시인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보다는 이런 말을 하는 게 더 잘 어울릴 거 같은 순수청년이었다. 이슬을, 별을, 구름을, 이끼를, 잘도 아는 그의 맑디맑은 시심이, 잊고 지낸 옛 친구처럼 반가웠는데. 이리도 여릿여릿 정겨운 표현을 쓰는 현시인의 다른 시는 뼈마디 녹는 시린 애가였다.

 

누굴까요 맹물을 타지 않은 진한 국물을 꽃물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며칠 굶어 데꾼한 얼굴의 사람들은 숨을 곳을 먼저 찾아야 했습니다 마을을 잃어버린 사람들 한데 모여 마을을 이뤘습니다 눈 내리면 눈밥을 먹으며 솔개그늘 아래 몸을 움츠렸습니다 하룻밤 죽지 않고 버티면 대신 누군가 죽는 밤 찬바람머리에 숨어들어온 사람들 봄 지나도 나가지 못하고 동백꽃 각혈하며 쓰러져간 사람들 사람들 꽃물 한 그릇 진설합니다

누굴까요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비꽃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우리말 사전- 전문


이런 그의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향을 준 한 사람이 현시인 곁에는 있었다. 음악과 영화와 문학을 알려줬던 외삼촌 홍기찬은 일찍이 먼 곳으로 떠나 그에게 상실감도 안겨줬다. 현시인의 첫 시집 <지구 레코드>는 그렇게 외삼촌을 구원의 표상으로 기렸다. 현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 원동력이 외삼촌이라면 아내인 김시인의 시적 마중물은 그녀 아버지라고 했다. 시라는 공통분모로 만난 그들 부부는 참으로 다양한 역할을 현재 소화해 내고 있다. 주객전도만은 사양하는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시인'이길 바라지만 말이다. 왕성한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시 노래 음반을 제작하고 뮤직비디오를 만들었으며 독립 출판사를 연 그들은 놀랍게도 영화 주인공이라는 의외의 여행까지 하게 된다.  


·····

하얗고 큰 그리움을 올리는 배의 이름은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얇고 부드러우나 때때로 구겨지는 푸른 비단을 항해하는 여행

짧게는 돛단배


사라진 별의 반짝임을 쓰는 마음의 이름은

아잔타 석굴의 먼지벌레가 두고 온 공간에게 쓰는 편지

짧게는 시


-여행길- 부분


현 시인의 아내인 김신숙 시인은 영화교실 수강생이 된다. 그녀는 남편이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김시인의 친화력에 자연스레 이끌린 감독은 셋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한다. 첫만남에서 ‘큰 덩치에 샛별같이 반짝이는 눈을 가진’ 현 시인에 꽂혀버린 감독. 창작열에 불타오르던 시절도 지나고, 무언가를 새롭게 시도하기엔 두려운 마흔 즈음에 심한 무력감에 빠진 현시인. 지나치게 억척스러운 아내의 언어는 시인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이런 자잘한 일상사를 김시인으로부터 들은 김양희 감독은 단숨에 시나리오를 써서 2017년 영화를 만든다. <시인의 사랑>, 이 영화는 부산영화평론가협회 각본상과 동시에 전주국제영화제 시네마 프로젝트 2017로 선정되었다. 토론토영화제에 초청받으므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퍽도 다채롭다. 이 같은 부부를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수줍게 한구석에 숨어있는, 너무 작아 찾아내기 힘든 서점 간판. 반면 첫눈에 확 드는 창에 붙은 포스터엔 6월 14일부터 시월 말까지 여기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잡아라! 나는야 동화 작가'를 안내한다. 차분한 실내에 가지런하게 진열된 약간의 시집과 제주 관련 서적들. 대형서점에 익숙한 시선으로는 책보다 벽보처럼 붙은 '시를 심어볼까'와 4·3 길을 걷다, 란 제주 지도가 크게 부각된다. 부부의 시정신 내지는 계속 나아갈 지향점이 읽힌다 할까.


닮은 점이 많아 마치 남매 같은가 하면 온탕과 냉탕 같은 시인 부부. 그들이 운영하는 시옷 서점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마중을 나가고 싶은 마음으로 문을 연 문학 실험실이자 시 창작실이며 공부방이고 동화쓰기 모임 장소다. 시를 읽기만 하는 데 그치지 말고 몸에 걸치는 옷처럼 온몸으로 받아들이자는 뜻으로 지은 이름 시옷. 모두가 시를 입는 삶을 살기를 부부는 꿈꾼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에 시옷 서점이 수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 부부는 행복한 표정이다. 성공한 삶의 기준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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