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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Mount San Jacinto
by
무량화
Jan 8. 2025
아래로
LA를 감싸 안은 남서쪽 산봉우리 역시 꼭대기에 흰 보관들을 쓰고 있다.
순간, 몇 해 전 가본 샌 하신토가 생각난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이 아닌 공간이동을 순식간에 한 듯 놀라운 반전을 보이던 산.
샌하신토산주립공원(Mount San Jacinto State Park), 해발 8516피트 마운틴 스테이션까지는 백두산 높이인데도
세계 최대 로프 웨이인
트램카를 타니 10분도 안 걸려 도착했다.
둥근 회전식 트램카라 360도 어디나 조망이 가능하나 눈아래 경치가 그리 절경은 아니지만 끝 모르게 가물거리는 아득한 허허벌판 황무지가 장관이었다.
정상에 닿아 전망대를 넘어서면 침엽수 울창한 숲이 펼쳐지며 삼림지대로 이어지는 하이킹 코스와 연계된다.
완전 딴 세상, 눈앞에 홀연히 전개된 풍경이 마치 환몽같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금방 지나쳐온 건조한 사막, 이번엔 울울한 삼림이 한순간에 교차되는 찰나의 반전이야말로 놀랍다 못해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위아래 기온차가 심해 여벌옷은 필수다.
멀찍이 둘러선 연봉 끄트머리마다 희끄무레 눈 얹힌 자욱이 보이나 별로 춥지 않은 캘리포니아다.
한겨울, 상가와 마을이 아주 띄엄띄엄 나타나는 사막도 아닌 황야지대를 내처 달려갔다.
팜스프링스 가는 길에 눈구경할 수 있는 곳을 한 군데 들린다 하였다.
운전 중인 딸이 나지막이 그러나 빠르게 외쳤다.
"열 한시 방향! 바람의 계곡이야, 여기서 음...." 고개를 돌린 찰나.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모래언덕에 새하얀 풍차가 무리 지어 돌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풍력발전단지를 의외로 만난 나는 빠르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그 사이 차는 방향을 틀어 황량한 바위산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10번 프리웨이에서 어느 결에 차는 111번 하이웨이로 갈아탔던 것.
여행 나서기 전 셀폰 외에 필히 챙기는 대형 지도다.
젊은 애가 마치 아날로그 세대 같다.
상세하고 친절한 인터넷상의 온갖 정보를 길잡이 삼지 않는 이유는 훤하게 다져진 페이브먼트 대신
미지의 오솔길을 열어가고 싶어서란다.
사전 예비지식 없는 백지상태에서 의식을 자유로이 풀어놓고 그냥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오감으로 받아들이기.
그래야 천편일률성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눈과 마음으로 대상과 대화 나누고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진으로 좌악 훑어보고 속속들이 내용 훤하게 알고 간다면 대체 사진과 현장 대조하자는 것도 아니고.
평소의 담박한 성격대로 재잘재잘 상냥스런 수식어 없이 눈앞에 바짝 다가선 산을 바라보며
트램카를 탈 거라고 했다.
틀에 박힌 관광이나 호화판 럭셔리 여행보다 스토리가 있는 나들이를 선호하는 내 취향을 옳게
헤아려 매번 감동이 따르는
순례처를 선정하곤 한 딸내미다.
나름 고심한 흔적이 느껴질 정도로 시의적절한 장소와
스케줄을 준비해 준 덕에 길을 떠나 실망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행복한 기억으로 저장된 샌디에고의 올드타운에 앞장서 준 것도, 산타바바라의 오래된 미션으로 안내한 것도, 비숍의 에메랄드빛 호수를 보여준 것도 딸이었다.
만년설을 인 위트니 산자락과 소금꽃 핀 모노레익까지 차를 몬 딸은 일망무제로 펼쳐진 곳곳의 캐년들을 둘러볼 수 있게도 해주었다.
대자연이 펼치는 장엄 교향곡을 듣게 한 옐로스톤 방문도 딸이 주선한 자리였으며
고행승처럼 해 질 녘 적막 속에 서있는 죠슈아 트리를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도 딸내미였다.
서부로 옮겨오기 훨씬 전, 주황빛 들양귀비
무리 지어 나부끼는 환상적인 들판을 만나게 해 주었으며 끝 모르게 황량한 데스밸리 가는 길, 석양의 사막으로 인도한 것도 역시 딸
이었다.
구절양장 헤집고 오른 빅베어 호숫가 산장에서의 모닥불 추억.
샌버나디노 산길을 맨발로 걸으며 느꼈던 흙의 감촉은 맑은 새소리와 더불어 오래오래 잔잔한 미소로
남아 있다.
머리 복잡할 적엔
말리부 해변가 달리며 푸른 해풍으로 울적한 심사를 날려 보내주었다.
심란스런 날엔 굽이굽이 감탄사 터지는 아름다운 라호야 비치로 데려가 눅진 기분을 환기시켜 주었다.
뿐인가. 건조한 일상에 윤기를 보태고 싶은 때는 게티 미술관으로,
할리우드보올 음악회로
,
뮤지컬 구경으로 호사시키며 생활의 먼지를 털어내게 했다.
낯익은 글씨로
가득 찬 한국 서점에 들러 읽고 싶던 책을 호기 부리며 주섬주섬 끌어안게도 해준 딸내미다.
이처럼 신뢰할만한 딸의 안목과 기준인데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완강히 버티고 선 바위산만은 아무래도 잘못짚은 것 같았다.
메마른 풀포기 외엔 그럴싸한 잡목 한그루 품에 보듬지 못한 삭막한 화강암 투성이 산은
압도하듯 무작정 높기만 했다.
산기슭에 희끗희끗한 눈, 저 꼭대기에 오른 들 별난 것이 기다리겠나 싶어 지레 기대치를 덜어내고는 트램카에 올랐다.
뾰쪽하게 날 세운 거친 암석들이 발치를 찔러대는 것 같아 괜히 오금이 저렸다.
아슬아슬 깎아지른 절벽 사이 둥지를 틀었던가, 불현듯 솟구쳐 오른 독수리의 나래짓은 힘찼다.
해발 1만여 피트 높이의 샌 하신토 산, 한 줄 로프에 의지해 올라온 협곡은 아득하고
저 멀리로 조망되는 무채색 황무지는 어룽어룽 현기증마저 일으켰다.
정상에 이르자 싸하니 밀려드는 솔바람 눈바람, 시린 냉기.
청정지역 눈은 향기를 품었는가, 낙락장송 푸른 솔에서 퍼지는 피톤치드인가.
성지에서나 느낄 법한 투명하면서도 청량한 기운에 짜르르 이는 전율.
동시에 자력처럼 끌어당기는 아지 못할 힘에 이끌려 휴게실을 서둘러 벗어나자마자
놀라운 신천지가 건너편에 전개되어 있었다.
뜻밖의 반전이었다. 놀라운 변환이었다.
눈은 보통 겨울에 해발 4천 피트 이상에서 내리기 시작, 봄까지 눈이 온다는 샌 하신토다.
여태껏의 바위산과는 전혀 다른 홍송 울창한 원시림과 깊은 설경이 기다리고 있는 산너머 저쪽.
상상 밖의 세상이었다.
비장의 카드로 역전시키는 뻔한 결말이나 유추 가능한 반전이 아니라
그야말로 깜짝 놀랄만한 반전, 경이로운 반전 그 자체였다.
환호에 앞서 기막힌 신천지를 준비해 두신 신께 공손히 합장을 하였다.
막막한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는 대상들이 꿈꾸며 갈망해 온 기다림에 대한 응답이다.
그와 달리 아무런 기대도 없었고 기약된 것도, 보장된 그 무엇도 당연히 없었다.
해서 더욱 경이로웠던가.
그 놀라운 반전을 나의 삶에도 대입시켜보고 싶었다.
신통한 일 하나 없이 매양 그 타령인 나날에 질식할 것 같을 때,
잠잠할 새 없이 이어지는 거친 파도에 부대끼며 쓰러질 듯할 때,
질척대는 뻘밭 같은 일상의 연속에 질려 주저앉고 싶을 때가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있다.
긴 항해에 지친 콜럼버스의 눈앞에 나타난 푸른 섬이 그를 절망에서 구해주었듯이
지난날 나에게도 그런 반전의 순간들이 있었다.
혹여 앞으로도 힘든 순간이 생기면 분명 반전 상황 또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짠~하고 열리는 눈부신 신천지를 맞는 기쁨은 누구에게나 일생에
몇 번쯤은 틀림없이 마련되어 있을 테니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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