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여는 새해 첫 아침. 우리 가족은 지리산 설경을 방문하기로 했다. 산보다 먼저 만난 것은 강이었다. 玉石 잠겨 얼비치는 양 내내 깊은 연록빛 섬진강. 굽이마다 가없는 평화 거느리고 醇厚한 동양화로 흐르는 그 강물.
청대 숲 그림자 갈잎 소리 더불어 낙관으로 찍힌 몇 마리 철새 띄우고도 이윽고 정물이 된 섬진강이었다. 자갈 대신 결 고운 은모래에 물살 무늬 역시 고요로워 정결하기조차 한 모랫벌. 어느 서예전에서 마음에 담아 온 보현행원품 60曲屛 두르면 이만큼 머릿맡 평온할까.
섬진강이 淸寒함은 아마도, 반야봉 눈 녹여서 피아골로 내리다 거듭거듭 굽이 틀어 불일폭포로 치달려 온 까닭이리라. 섬진강이 유독 淸凉함은 화개 다향 풀어 안은 연유에서이리라. 해서 그 강 언저리에 돋는 방언마저 淳實하고 정겨울 듯싶다.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 낮은 토담 너머 박꽃처럼 피어날 것 같은 하동에서 구례에 이르는 길.
동행하는 섬진강은 하냥 순결한 아름다움 간직한 고전의 강만 같았다. 아직은 물질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채 그윽한 골 계류처럼 투명하니 맑고 푸른 강. 그 정기 언제까지나 그대로 남아 삼동 설한풍도 녹일 서정시 되어지길 바래본다. 어쩌면 현대화 산업화에서 소외된 낙후성이 오히려 구원이었구나 싶기도 하다. 물론 속내 깊숙이 간직된 아픔이야 쓰리고, 가난인들 어이 고통이 아니랴만 끝까지 죽지 않고 서는 것은 물질이던가 정신이던가.
순한 얼굴로 목소리 나직이 지치지도 않고 따르는 섬진강. 자연의 순리대로 법계의 질서대로 그저 묵묵히 흐르는 섬진강. 콸콸 여울지는 물소리도 없다. 소용돌이치는 물굽이도, 거센 물보라도 없다. 그러나 강 가까이 다가서 보라. 江心 아니라도 섬뜩한 비수로 사뭇 긴장케 하는 물빛.
본래 깊은 물은 고요한 법. 침묵하는 자의 헤아릴 길 없는 심중은 더욱 두려운 것. 하지만 섬진강은 갈등도 대립도 절망은 물론 뼈 시린 한까지도 한데 삭혀 싣고서 도도히 흐를 뿐이다. 그렇게 강물은 흘러 흘러 바다로 간다. 화합의 바다 모두가 공평히 하나 되는 융해의 바다로. 우리도 부디 그리 살았으면.
이윽고 섬진강과 작별하고 화엄사 노고단 안내판 따라 지리산 품으로 꺾어 들었다. 멀리 눈을 인 준령 준봉 마주하며 산채향 감도는 마을 지나 화엄사 오르는 길. 순백의 산을 보리라던 기대와는 달리 숲에는 매운 눈바람만 융융 거렸다. 소나무는 더욱 청청하고 나목은 아무것도 가린 게 없다. 무욕의 수도승 되어 무심의 경지를 冬天에 비춰보고 섰는 걸까. 가득참 보다 비어있음으로 충만할 수 있다는 역의 묘리가 문득 생각난다.
일주문 들어서며 느낀 바대로 과연 화엄사는 고색창연한 대가람이었다. 萬行萬德 닦아서 佛果를 장엄하게 하는 일이 화엄이며, 불교의 가장 높은 교리를 설한 경전이 화엄경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대웅전을 비롯 석등이며 석탑이 무한한 塊量感으로 압도해 온다. 각황전은 더더욱 웅장해 重層인 大佛殿, 세월 잊고 여전히 늠름한 기상이다.
단청 호사 입지 않은 고찰의 아름드리 기둥에서도 그러하지만, 木理 드러나는 법당 청마루를 내려다보노라면 생명의 내재율이 빚어놓은 천년 전 나무의 이야기가 들려올 거 같다. 올곧은 재목 되어 불사에 동참하고저 발원한 기도 소리도 전해진다. 더불어 이끼 핀 석등의 연꽃잎에서 신라의 숨결과 만난다. 불전의 창살무늬에서는 조선의 맥박과 악수한다. 그 잠시 시공 초월하는 환상에 잠겨봄도 꽤나 근사하다.
각황전 돌아드니 뒤뜰에서 곧장 이어진 언덕은 동백나무 천지다. 어느덧 잎새에 스미는 낙조. 밀밀한 동백 숲은 차라리 시커먼 적막이다. 그믐날같이 어둔 밤이다. 자취 보이지 않고 날갯짓만 들려오는 새소리. 깃 치며 푸덕이는 그 새는 동박새일까. 동백꽃 붉게 벌 무렵 다시 오르고 싶은 곳. 네 마리 사자가 떠받든 석탑 아쉽게 마음에 점찍어 놓고 내려오는 걸음마다에 산그림자 성큼성큼 다가선다. 거인처럼 크게 움직이는 산, 어둠.
화엄사 감싸 안은 긴 돌담은 그새 짙은 잿빛이다. 그 무채색 캔버스에 잎 진 담쟁이덩굴 추상화로 그려져 스치는 한풍 불러 테두리를 지으려는가. 바람과 담쟁이가 이마 맞댄 사이 서둘러 민박집 나무 대문을 밀었다.
오늘 밤. 꿈속에서도 여전스레 옥빛 섬진강 맑게 흐를 거고 어쩌면 화엄사 大鵬이 내게 날아올지도 모르지. 밤새도록 꿈길 거니는 동안 하얀 눈 소복소복 내렸으면 좋겠다. 온 가족 이대로 눈 속에 갇힌들 어떠리. 내일은 瑞雪 쌓인 지리산을 꼭 만나고 싶다. 19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