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
늦가을 오후, 김해평야 가로질러 대성동 고분 발굴 현장에 닿았다. 별다른 특징 없는 구릉에 농경지가 조각보마냥 누더기 진 곳. 무성하게 띠 덮인 동산만큼 큰 능을 상상했는데 전혀 뜻밖이다. 도도록한 융기 하나 남지 않은 채 비질 잘된 타작마당처럼 매끈히 다져진 토질.
구획 정리하듯 네모 반듯한 몇 개의 묘혈. 그 안의 발굴 팀은 세심하고도 주의 깊게 목하 작업 중이다. 얼핏 무슨 조감도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손삽으로 조심조심 파낸 황토흙은 양동이에 담겨 연신 지상으로 오른다. 횟가루 뿌려 그은 선 따라 수직 되게 깎아 내려간 그 아래 어렴풋 형체 비슷한 게 비친다. 긴장된 시선 모아 찬찬히 살펴본다. 한바탕 큰 비가 쓸린 뒤 예서제서 돌덩이 귀를 내밀 듯 토기 윤곽이 선연하다. 부식된 철제 마구편도 보인다. 의습은 물론 목곽 삭아 흔적조차 없고 맨땅에 똑바로 누운 인골이 드러난다.
地 水 火 風으로 흩어지고 마는 육신인데 이미 진토 되고도 남을 세월 동안 어찌하여 뼈가 그대로 남았는지 모를 일이다. 넋은 윤희의 거듭 속에 하마 옛 주인 잊은 지 오래일 터이거늘 차마 침묵으로 묻혀둘 수 없는 한마디 말 있었던가, 간절한 비원 품었던가. 아니면 버려진 가야의 역사가 너무도 안타까웠음인가. 뼈는 백골 아닌 녹슨 쇠빛깔이지만 가지런한 형태로 두개골 흉곽 다리뼈 등이 마치 색 바랜 엑스레이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인체를 지탱해 주는 신체의 주축인 뼈대, 그 뼈를 더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맏이가 선배들과 함께 겨울 방학 중의 몇 며칠을 집에서 骨學이란 공부를 할 때였다. 부분 부분의 뼈를 실물 통해 학습하는 시간인 듯했다. 니스 칠을 해 약간 노리끼리한 등뼈며 머리뼈 팔뼈가 두꺼운 책위에 얹혀있었다.
그들이 학교 간 뒤 방청소를 하며 흩어진 뼈를 정돈해 놓았다. 생각 같아선 손도 못 댈 것 같았는데 막상 접해보니 학습도구인 삼각자나 지우개나 별 차이가 없었다. 사람이 죽어 남긴 뼈임에도 의외로 섬뜩하다든가 께름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인골이라는 선입견에 따르는 제반 연상 작용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단지 실습 관찰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까닭일까.
그때 그 기분이나 지금 이 자리나 마찬가지다. 해골에 괸 물 마신 원효의 일갈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인가. 하긴 생명 있어 움직이는 내 몸속의 뼈나 흙속의 저 뼈나 무에 유다르며 낯설 리 있으랴. 더구나 혼을 떠나보낸 무기물로 남은 지금에서야 그냥 한낱 물질일 뿐인 것을.
경성대 발굴조사 단장이 드러난 부장품을 막대 끝으로 짚어가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퍽 진지하다. 고고학과는 거리가 먼 내 귀에도 생경치 않은 단어들이 흘러든다. 이미 신문 기사를 통해 보충해 둔 예비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4,5 세기경 금관가야 지배자가 묻힌 남한 최대 규모의 목곽 묘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 일차 발굴에서 방패 장식구로 유추되는 巴形銅器와 祭儀用 筒形 銅器가 출토된 곳. 그 외 말안장과 말 얼굴가리개 및 다량의 甲胄類가 나와 번창했던 철기문화의 자취를 짐작케 해 준 고분이다. 장식성이 정교한 대형 토기도 여러 점 화보로 선을 보였었다.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부산권에서 강력한 정치 집단으로 융성했던 가야의 고대사가 입증된다고 보도된 바도 있다.
몇 세기 동안 낙동강 하구에서 활발한 해상 활동을 펴면서 나름의 문화를 꽃피웠던 부족 국가. 그러나 신라에 합병됨으로써 역사의 어둠에 파묻힌 가락국기. 그 고대 사회의 세력 판도와 사회 구조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는 게 바로 이 고분이다.
수년 전 김수로왕릉에 갔을 적 일이 떠오른다. 벚꽃이 막 벙글기 시작하던 그날은 마침 김해 김 씨와 김해 허 씨 화수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때 침을 튀기면 흥분된 어조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을 성토하던 다혈질의 노인은 가야에 대해서라면 막히는 데가 없을 성싶었다.
구지봉, 아유다의 공주 허황옥, 파사 석탑, 칠불암으로 이어지는 달변은 끝날 줄 몰랐다. 더불어 금관가야 왕족이었다는 김유신, 가야금을 전한 대가야의 우륵, 학문으로 공헌한 강수 등을 열거하며 가야의 인물과 문화가 어떻게 신라 발전에 이바지했는가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 헌데도 삼국사기가 가야에 대해 너무 인색하다는 거였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거였다.
역사란 인류사회의 변천과 홍망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 정의한다. 그러나 실제 민족사의 새벽에서 삼국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 가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미미하다. 어떤 한 가지 사실도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물론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판단 기준이나 관점이 다르다 보면 모순된 평가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다 해도 도무지 너무 어이없고 여간 억울한 게 아니라는 듯 목청 돋우던 가락국의 후손.
왜곡된 채 삭제된 역사인 탓에 전설로나 겨우 명맥이 유지되는 가야. 그 가야의 굴절된 사관을 시정해 줄 자료들. 초가을 햇볕 아래 노출된 저 부장품들로 은폐시킨 역사의 한 장이 두터운 장막 떨구고 명징히 모습 드러낼 수 있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유물과 유적의 가치는 그래서 높이 평가되는 것이 아니던가.
순간, 요란한 비행기의 굉음이 지상의 낱말들을 삼켜버린다. 김해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비행운 길게 끌며 삽시간에 벽공 속으로 사라진다. 미지의 세계이긴 마찬가지이나 그 비밀을 줄기차게 탐색하고 추정하여 파악하는 역사학과 체계적으로 참구하고 실험하여 발전시키는 첨단과학. 서로 다른 두 분야가 하늘과 땅처럼, 생과 사처럼 미묘하게 대비되는 순간에 나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점차 오후 햇살은 쇠잔해지고 낙동강 저 건너편 스모그에 싸인 부산 외곽이 아른아른 아득하게만 보인다.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