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 속에서 사진을 찍는 중에 카톡 내용이 떴다.
딸내미가 보낸 꽃바구니가 도착했다는 알림이다.
미국에서도 생일과 머더스데이를 맞으면 해마다 거르지 않고 딸은 꽃선물을 하곤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꽃을 받는 게 버릇이 들려 세상 소풍 마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기념일엔 꽃을 기다리지 싶다.
생화는 머잖아 시들고 말지만 그래도 난, 유형의 어떤 값진 물건보다도 꽃을 받으면 기분 흐뭇해진다.
꽃바구니 건 부케 건 마침내 드라이플라워가 되도록 두고두고 바라보며 행복감에 젖어 지낸다.
옷이나 가방, 스카프처럼 용처가 뚜렷해 실용적인 선물과 달리 꽃은 한시적이다.
그럼에도 좋고 그래도 괜찮다.
눈도 그렇다.
녹고 나면 그만이지만 잠시 순간 보여주는 별유천지의 비경은 영혼에 타투처럼 각인된다.
새하얀 눈송이가 빚어내는 고혹적인 설경은 영적 엑스터시에 빠지게 만든다.
아주 잠깐인, 찰나의 정점을 접하면 그 신비경에 우리는 누구나 신음소리 같은 경탄을 발한다.
희디 흰 설원, 이 세상 풍경 같지 않은 눈부시게 정결한 화폭 마주하면 도저한 황홀감에 마침내 말을 잊는다.
설화이건 빙화건 상고대건 겨울철에만 피어나는 이 신비로운 꽃을 만나러 그래서 우리는 고산지대를 찾아간다.
천백고지로 눈을 보러 올라간 게 올 들어 벌써 몇 번째인가.
설연휴가 끝날 무렵 하루 잠깐 백설에 감싸인 백록담이 모습 드러냈다.
이후 요 며칠새 한라산을 도통 볼 수가 없었다.
연일 눈구름인지 눈안개인지에 자욱하게 휘덮여 있었으니까.
모임에서 5일 날 윗세오름 산행을 계획했으나 기상관계로 다음 주 10일로 미뤘지만 그날 또한 러셀작업이 원할치 않아 주 후반으로 미뤄졌다.
이처럼 한라산 날씨는 변화무쌍, 종잡을 수 없다.
서귀포 시내는 동백꽃 유채꽃 수선화 앞다퉈 피어나는 영상의 기온이건만.
엊그제부터 대설특보가 내린 한라산은 1미터가 넘는 눈이 쌓였다고 한다.
따라서 천백도로, 오일육도로 등이 전면 통제되며 성판악, 어리목, 관음사, 영실코스 등 모든 탐방로가 닫혔다.
눈꽃버스 운행도 자연히 멈춰 섰다.
그 이전 용케도 타이밍을 제대로 맞췄다.
보통 적설량이 많아지면 천백고지 습지 탐방로는 닫히는데 이번엔 열려있다.
더구나 변화무쌍한 날씨라 눈발 흩날리기도 하다가 파란 하늘도 펼쳐냈다.
로또 당첨쯤 비교도 안 될, 천상의 선물을 제대로 접수했으니 이 무슨 행운인지 어리벙벙.
그토록 기대하고 고대하던 설경의 극치를 축복처럼 접할 수 있었다.
아니 기대 그 이상이라 영산의 설문대할망께 삼가 황공 감사드릴 따름.
사방 질펀하게 일망무제로 펼쳐진 천백고지의 설원은 넋을 잃게 만들었다.
날씨는 변화무쌍, 탐스런 눈발 흩날리다가 푸른 하늘 산뜻하게 드러내며 다채로이 펼쳐지는 천상의 축제.
어느 해 겨울 덕유산에서 백산호 군단 같은 설화를 만나본 이래 최고다.
스케일 면에서야 아예 비교 자체가 안 되는 덕유산 설화이지만.
과연 남한 내의 최고봉인 한라산은 은하수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높고도 큰 산 맞다.
백설 만건곤해 자취 묘묘한 저 한라의 비밀스런 웅자.
장관이다,
경이롭다,
대단하다.
그 어떤 형용사로도 근접 설명은 어림도 없다.
폰으로 담아낸 조잡한 사진 쪼가리로야 그 진면목 훼손시킬 뿐일진대.
저리도 아득하게 찬란한 묘경 표현할 방법 찾지 못해 차라리 무연히 바라만 보았다.
깊숙이 한 번씩 심호흡 몰아쉬면서.
대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서면 왜 우리는 무한 경건해지는지... 눈가 자꾸만 뜨거워지는지.
연신 감탄사를 발하던 동행들도 종당엔 침묵에 빠
져들었다.
죄다들 유·구·무·언~ 눈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