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만년 전 화산 활동으로 생긴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이라 불리는 하논분화구. 거처에서 산책하듯 걸어 이삼십 분쯤이면 닿는 만만한 거리다. 봄볕 다사로운 한낮, 지질학적 가치보다는 단지 자운영 꽃이 피었나 궁금해 하논으로 향했다. 간 김에 서귀포 천주교 신앙의 모태인 하논성당 옛 터도 여유롭게 둘러볼 참이었다. 이재수의 난과 연관된 신축교안의 아픔을 간직한 제주 천주교사의 중요한 성지이기도 한 곳이다. 처음 하논에 와서는, 추수 뒤의 벼 그루터기와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자연산 우렁이 구경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하논 초입 농가 마당에 어느새 목련화 보얗게 피어났고 동백 꽃송이째 툭 툭 이울고 있었다, 논갈이가 시작되기 전의 들녘길은 아주 고즈넉했다. 찔레순 연한 덤불에 버들가지 꽃처럼 고운 한낮이다. 부신 양광 아래 쑥 뜯던 자매 모습이 논둑길 저만치 소실점으로 멀어져 갔다.
귤밭 돌담 이어진 삼거리 길에서 문득 봉림사가 떠올랐다. 어느 해 봄, 하논 끝머리 그 절 뜨락에서 얼음새꽃이 핀 걸 봤던 생각도 났다. 먼저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봉림사는 4.3의 회오리에 휩싸여 아랫마을과 함께 잿더미가 됐으나 1968년 옛터에다 대웅전을 지었으며 1994년 중수하였다. 현재는 조계종 제23 교구 말사다. 분화구 언덕에 자리한 봉림사라 이마 위로 높직하니 일주문과 대웅전이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어 한 줄로 드러난다. 대웅전 앞뜰에서 노란 수선화가 먼저 아는 체했다. 그 옆 바위그늘에 기대했던 대로 얼음새꽃이 환하게 피어있었다. 거기에 아, 눈길 사로잡은 꽃무더기. 유년의 추억이 어린 다홍빛 고운 명자나무꽃이 한아름 꽃바구니처럼 만개해 있었다. 발길이 그래서 여기로 은연중 이끌렸던가?
사방에서 봄노래 들려오는 하논 성당터에서다.
서귀포 지역 최초의 한논본당이 자리했던 곳.
양광 따스하고 바람 고즈넉한 한나절.
어드메선가 낮닭 긴 울음소리가 꼬끼요오~ 나른하게 들려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도 한가로이 섞여 들었다.
어느 결에 노고지리 목청 청량하게 가다듬었으며
한 번씩 꿩도 단음으로 꺼걱거렸다.
휘파람새며 뭇 멧새 떼 지저귐으로 전원 풍경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미묘법문으로 스며드는 그 호젓함에 잠겨 마냥 봄기운에 취해 들었다.
경운기 탈탈거리는 소음조차 거슬리지 않고 외려 건강한 삶의 운율로 느껴졌다.
기계 소리 시끄럽거나 말거나 동백 고목 둥치에서 들리는 맑은 까치소리,
반가운 소식이 오는 것 같아 동구 쪽에서 중심부로 시선을 돌렸다.
성당 터에 마치 제단처럼 쌓인 비정형의 현무암 바위들이 묵직한 주제의 강론을 들려주는 듯했다.
위치 선연히 짚이는 독서대 아래 소복 깔린 애기별꽃 냉이꽃 봄까지꽃 청신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적 영혼인가가 별 되어 꽃 되어 옛 인연 찾아온 듯 자태 다소곳하였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까지 천주교는 극심한 박해를 받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병인양요에 대한 보상으로 1886년 조.불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천주교는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됐다. 당시 고종은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에게 '여아대(如我待, 짐을 대하듯 하라)'라는 사실상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증표를 내렸다. 힘없는 나라의 무능한 정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천주교 신부들은 제주에도 내려왔다. 신부 빽을 믿고 설친 지방 봉세관 강봉헌은 천주교도였다. 그는 기존 세금에다 어장·그물·소나무·목초지 등에도 따로 세금을 매기며 무리하게 징세를 늘려갔다. 수탈 횡포를 견디지 못한 수많은 제주 주민들은 천주교로 개종하기만 하면 신부의 특권으로 수혜를 누릴 수 있었기에 다투어 개종했다.
하논 성당터에서 문득 대정마을이 생각났다.
어떤 비석 앞에서 옷깃 여미며 숙연해졌던 그날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이재수의 난이 일어난 직접적 단초가 된 종교의 횡포,
곧 1901년에 발생한 이 민란은 천주교와의 마찰이 한 축을 차지했다.
천주교라는 외래 종교와의 갈등과 정부의 조세 수탈 등의 폐단이 상호 연관되며 민란의 원인을 제공했다.
대정현 관노의 지위에서 민란의 지도자가 되어 죽음의 길로 나선 이재수.
서귀포시 대정읍에 세워진 삼의사비(三義士碑)를
지난겨울 추사 기념관에 가다가 본 적이 있다.
비음기(碑陰記)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심장 서늘하게 하는 문장이었다.
선교사들 눈에는 제주 사람들이 '거칠고 배타적이며 미신에만 집중하는 야만인'으로 보였다. 응당 선교를 통해 계몽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 선교사들은 제주의 전통적인 토착문화, 무속신앙, 관습 등을 무시하고 배척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마을의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神木)을 베어버리는 등 무리한 짓을 자행했다. 교세를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점차로 문화적 충돌이 크게 일어났다. 당시 현장조사 보고서인 '삼군교폐사실성책'(三郡敎弊査實成冊)을 살피면 '교폐(종교 폐해)'와 '세폐(세금 폐해)'가 얼마나 자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교인 고인관이 봉세관(세금 징수관)의 명령이라 칭하고 어망세 25냥을 받아 갔다.' '수백 금의 비용을 들여 오조리에 서낭당을 지었는데 교인 이기선이 여러 교도를 풀어 방화하고 나무를 베어 갔다.'라고 적혀 있다. 오브에 선률 명징한 영화 <미션>에서의 선교사와 원주민 간 화합을 왜 그들은 못 이뤘을까. 하늘뜻 올곧게 받들려는 종교적 신념 열절해도 희생조차 순수하게 다가오지 않았음은 왜이겠나.
제주 본당을 설립하고자 프랑스 선교사인 페네 주임신부와 함께 보좌신부로 온 김원영 아우구스티노 신부. 갓 서품을 받은 젊고 의욕 넘치던 김 신부는 섬 전체에 만연한 미신 숭배를 타파하고자 전교에 박차를 가하며 수신영약(修身靈藥)이라는 한글 필사본을 집필했다. 더불어 섬에 고질로 굳은 축첩행위와 이단적 풍습에 대한 척결 의지도 강하게 드러냈다.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투철한 선교 열정에다 기질이 강직하고 직선적인 김 신부는 도민들의 반발을 사, 자주 마찰을 빚었다. 한논공소를 설립할 당시 신자 20명, 예비자 30명이던 교세는 일 년 만에 신자 수 137명 예비자 620명을 기록하였다니 얼마나 공격적인 선교활동을 했던 걸까. 사제 회의에 참석하느라 그가 서울에 와있던 중에 신축 교안이 일어나 김 신부는 다시 섬에 들어오지 못했다.
매사 과유불급이라 하였다.
완급을 조절하며 순리에 따랐다면, 무엇보다 주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었더라면 그런 불상사가 생겼을까.
이재수의 난으로 천주교 신자 수가 137명에서 35명으로 줄어들었으며 하논 본당은 폐허가 되었다.
하논 본당은 1902년 6월, 다케 신부에 의해 서홍동 홍로 본당으로 이전했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 외규장각 의궤 등 도서를 약탈해 갈 당시 길을 안내한 리델신부.
아무리 프랑스인이라지만 그 이전 하늘 끝까지 복음 전하겠노라 서약한 종교인.
언필칭 목자라는 그들의 과열된 맹목적성에
고개 가로저었던 고약스런 기억뿐인가.
남미에서 십자가 앞세워 잉카, 마야문명을 말살시킨 스페인 군대, 그들과 다를 게 뭔가 싶기도.
내 신앙이 그토록 귀중하다면 남의 종교도 존중해 줘야 마땅하거늘.
1901년 5월 초 대정지역 지도자들은 '상무사(商務社)'라는 조직을 만들어 세폐·교폐의 시정을 요구하는 건의문을 작성했다. 이를 제주목사에게 제출하기 위해 오대현을 장두로 내세우고 제주읍성을 향해 출발했으나 도중에 장두가 체포되었다. 그 와중 일부 천주교도들은, 대척점에 선 상무사 위원들 집을 공격했고 그 보복으로 상무사 측은 대정 천주교당을 습격하는 등 분란이 쌓여갔다. 오대현이 죽자 그를 대신해 무장봉기군을 이끌며 앞장선 사람이 바로 관노 출신인 이재수. 제주목사와 봉세관 강봉헌은 일찌감치 섬을 벗어나 피신했다. 제주성문을 걸어 잠그고 대포를 설치한 천주교민과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은 지루한 공방전을 계속 벌였다. 성내 사람들이 민군에 호응해 성문을 열어쥬면서 양측의 대치는 끝이 났다. 제주성에 입성한 이재수는 관덕정 광장에서 천주교민들을 처형했다.
6월이 되자 연락을 받은 프랑스 군함이 급히 들이닥쳤다. 대한 제국의 군대도 파견돼 이재수 등을 체포, 서울로 압송해 교수형에 처했다. 이 민란은 외래문화와 토착문화, 국가와 변방 사이의 충돌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나아가 향촌 질서를 어지럽힌 부당한 간섭에 대한 저항이자 토착문화를 짓밟은 외세에 대적한 민중항쟁으로 역사는 정의하고 있다. 반면 천주교 측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받은 '신축교난'(辛丑敎難) 또는 '신축교안'(辛丑敎案)으로 정리했다. 한편 2001년 이재수의 난 100주년을 맞아 민란을 '제주 항쟁'이라 명명했다. 동시에 로마교황과 한국 천주교회, 프랑스 정부에 대해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역사적 진실규명을 촉구했다. 양측은 갈등을 이어오다가 천주교 제주선교 100주년을 맞아 과거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대화 통해 화합 화해 상생의 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논성당 터에 피어난 작디작은 풀꽃들.
왠지 그 꽃들은 뜻 없이 피어난 예사로운 꽃이 아닐 것만 같다.
민란에 일신 초개같이 던진 민초들 일지, 하늘님 하늘같이 모시던 서학쟁이들 일지, 내사 아지 못하지만 아무튼 분명코 한 깊은 넋이지 싶다.
이 터를 못내 잊지 못하고 내내 구천 떠돌다가 기어이 예 돌아와 푸르고 흰 풀꽃으로 피어나고야 말았으리라.
몇 세를 감돌며 꼭 그러마 작정했으리라.
기대했던 자운영 꽃은커녕 겨우 이파리만 고개 쏘옥 내밀었을 뿐, 꽃은 아직 시기 너무 일러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