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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01. 2024

밤하늘의 트럼펫

아닌 게 아니라 목요일은 참으로 긴 하루를 보냈다. 날씨부터 변화무쌍한 하루였다. 한 달 넘게 이어지는 고온다습한 몬순기후 영향으로 연일 후덥지근한 날씨다. 하늘엔 비구름이 시커멓게 몰려다녔다. 홍수경보도 걸핏하면 삑삑 울렸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게 없다고 요란 떨어봤자 비 몇 방울 흩뿌리고 지나갈 비였다. 나이 들수록 뻔뻔해지는 나처럼 겸손과는 거리가 먼,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날씨의 횡포가 기승부리는 요즘.



이미 예약된 음악회인 데다 일단 폭염의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더위에 지친 심신 위로도 겸해서 영혼을 정화시키고 싶었다. LA를 향해 집을 나서서 달린 지 삼십 여 분이나 됐을까. 불꽃이 곤두박질치듯 번개 요란하더니 뇌성이 귓청을 때렸다. 동시에 우박 섞인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창을 난타하는 빗방울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삽시간에 빗물이 물살 져 도로가로 소용돌이치며 흘러내렸다. 잠깐의 집중폭우가 도로를 곧장 황톳빛 여울로 변모시켰다. Red River Canyon은 말 그대로 성난 붉은 강으로 변모해 있었다.



산을 깎아 만든 도로라 절개지마다 벌건 흙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차는 물길을 피해 조심스럽게 중앙선에 붙은 채 서행을 했다. 희뿌연 차창 너머로 길게 꼬리를 문 차량행렬이 붉은 뱀처럼 죄다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구조 헬리콥터가 뜨고 경찰차 경광등이 번쩍거렸다. 도로 한복판의 급류에 갇힌 검은 트럭 위의 남자는 구조대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교통통제가 되는 구간을 벗어나자 차는 거침없이 저녁햇살 마주하며 달렸다.   

 


할리우드볼은 비의 흔적이라곤 찾을 길 없는 딴 세상이었다. 야외테이블에 식탁보를 깔고 분위기 있는 저녁을 나눴다. 식사를 하며 음악회 팸플릿을 뒤적거렸다. 그때 셀폰을 켜본 일행 중 하나가 나지막이 오마이~를 외치며 성호를 그었다. 우리가 뚫고 온 빗길 바로 아래 철로가 폭우로 유실위기에 처해진 사진을 보여줬다. 2백여 명이 탄 통근열차는 목적지를 포기하고 도중에 돌아섰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는 2 ~ 3 피트의 진흙과 빗물로 엉망이 된 14번 Freeway 일부 도로를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Soledad Canyon Road는 우리가 돌아갈 길인데 대략난감이었다. 철길은 당연히 폐쇄조치가 취해진 터였다.

우리의 불안은 곧 잊혔다. 여덟 시가 되자 LA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리를 잡았다. 지휘자 Vasily Petrenko가 등장했다. 1976년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아주 젊은 그는 러시아인이다. 현재 로열 리버풀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오슬로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다. 그 이전 1994 년부터 상 페테르부르크 국립예술학교의 수석 지휘자로 근무했다니 스무 살도 안된 나이였겠다. 까만 의상에 싸인 그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똑고르게 완벽한 체격인 데다 미소년형의 얼굴을 가졌다. 내 안목으로는 그 어떤 유명배우보다도 더 멋진 최고의 서양 미남이었다.



마침 대형 스크린 바로 정면 앞자리라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다. 맨 먼저 미국국가가 연주되었다. 객석 모두가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경건히 국가 합창을 했다. 프로그램 순서에 따라 브람스 심포니 돈 쥬앙으로 연주는 시작됐다. 그는 리듬을 타고 전신으로 지휘했다. 네바강에 비친 상 페테르부르크 궁의 야경처럼 아름답고도 화려한 지휘였다. 젊은이답게 힘차고 박력 넘치면서도 마지막 부분에서 허공으로 잦아들듯 지휘봉을 내릴 때의 동작은 그 자체가 유려한 예술작품이었다. 그때 보았다. 클로즈업된 그의 이마 전체에서 반짝이는 땀방울들을.  



 음악회 주제는 SOUND THE TRUMPET이다. 트럼펫 협연자인 Tamas Palfalvi는 1991년 헝가리 태생으로 여덟 살 때부터 트럼펫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겨우 이십 대 중반인 그는 환상적인 기교와 무대 감각, 특별한 음악 컨셉으로 현재 가장 촉망받는 젊은 트럼피스트다. 그는 Trumpet Concerto in E-flat을 들려주었다. 총총한 별빛에 보름 앞둔 달빛 환한 밤하늘로 트럼펫 소리가 미리내처럼 흘러 퍼졌다. 풀벌레소리 들리는 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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