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Jul 04. 2024

섬에서 몇 년 더 살아야 할 이유

미국에서 소포가 왔다.

딸내미 친구인 정선생이 보낸 트레킹화다.

거기 살 적부터 나는 머렐 마니아였다.

미국의 아웃도어 브랜드 머렐(Merrell)은 유타에 사는 랜디 머렐이 카우보이용 부츠와 등산화를 주문 제작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신발이라는 특화된 분야에 오랜 기간 집중해 온 머렐은 재구매율이 매우 높은 브랜드로 알려져 있다.

편안함과 기능성을 최우선시한 머렐은 충격 흡수 에어쿠션 기능을 극대화해 착용감이 특히 뛰어나다.

그럼에도 가격은 매우 합리적이다.

제품 포장지는 물론이고 재활용 종이를 이용한 박스를 사용하는 등 자원 낭비를 줄이는 일에 앞장서는 점도 미쁘다.

몇 년 전, 한 달여를 스페인에서 산티아고 길 걸으며 애용했던 신이 머렐이다.

야멸차게 정인 버리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 님도 아니면서, 카미노 걷다 보면 거의가 발병이 났다.

발가락이며 뒤꿈치에 물집이 생기는 일이야 다반사, 무릎이나 발목이 심하게 부어서 중도 탈락하는 예도 흔했다.

그럼에도 전혀 티끌만 한 문제도 발생한 적 없이 그 길을 편안히 걸어냈다.

마치 수호천사가 안전하게 보호해 준 듯이.

그때 신고 갔던 트레킹화니 몇 년을 애용한 터라 낡을 대로 낡은 신발.

하지만 그래도 가볍고 편해서 좋고 빈티지 느낌도 좋아 계속 신고 다녔다.

결국 바닥창이 다 닳아빠져 미끄러워서도 더는 신을 수 없게 됐다.

지난겨울 미국 집에 다니러 가서다.

새 운동화를 사려고 딸내미와 여러 매장을 돌아다녔지만 맘에 드는 게 없었다.

내심 머렐 제품 운동화만을 고집했으니 다른 신발이 눈에 찰리 있으랴.

편하고 가볍고, 신을 신었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그만큼 착용감이 좋은 신은 어느 매장에서도 만나질 못했다.

근방 어디에도 머렐 매장은 없었다.

하는 수없이 애꿎은 청바지만 골라 들었다.

그러는 우릴 지켜보던 정선생이 당장 아마존 검색 들어가 내가 찾는 신을 찾아냈다.

사흘 후 새 신이 배달됐다.

세일 기간이라 가격도 얼마 안 되네요.

이건 춘추용이니 여름 용도 사보낼게요.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소리라 여겼는데 여름 문턱에 척하니 도착한 새 트레킹화.

고마워, 정선생.

제 몫까지 엄마가 대신 산 많이 다니세요.

우린 물 들어올 때 부지런히 노 저어야 하니까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 지금은 그물을 당겨야 하는 호기, 궤도에 올라 바쁘게 돌아쳐야 하는 시기 맞다.

빡빡한 스케줄, 여건이나 상황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한갓지게 지내기 어렵다는 소리다.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쉴 새 없이 한창 바쁘게 일하는 사십 대 후반.

산행을 즐기는 그녀인데, 미국에서 나름 튼실하게 자리 잡고 잘 지낸다 해도 이민살이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다.

하긴 한국에 산다 하여도 마찬가지, 그 나이 즈음이 바로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하는 시기다.

취미생활 또박또박 찾아 하면서 만판 널너리하게 여유시간 즐기며 지내기 어려운 때다.

그런 삶의 사이클을 누구나 지나왔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그보다 더 세월 흘러 흘러서....

은퇴 노인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이 자유로와 바야흐로 화양연화 노래하는 지금.

여기서 몇 년은 더, 오름으로 올레길로 신나게 돌아다닐 명분이 생겼다.

신발 두 켤레 닳아빠지도록 걷고 또 걸을 것이다.

게다가 등산화도 두 켤레나 된다.

한라산도 가끔씩 올라갈 참이다.

네 켤레 신이 너덜거릴 때까지 날이면 날마다 날씨만 좋으면 자연으로 가 무진무진 걸을 것이다.

건강 허락하는 동안은 서귀포에서 모쪼록 즐겁게 기운차게!

정선생에게 고맙다며 보낸 인증샷

작가의 이전글 항파두리, 항몽 유적 읽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