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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04. 2024

광기의 홍위대가 남긴 것

90 쯤이었다.

처음 중국여행을 가서 만난 곳곳의 문화유적들에 내심 많이 놀랐다.

생각보다 훨씬 엄청나고 대단한 중화문명에 충격을 받았던 것.

중국 남부 항주 인근에서다.

불상이 무수하다는 동굴관광이 그날의 일정에 들어있었다.

영은사라는 대형 사찰을 구경한 뒤 동굴로 안내되었다.

산기슭의 종류굴이었다.

늘어진 종유석 하나하나 마다 불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거나 누워서 작업을 했을까, 박쥐처럼 벽에 매달릴 수도 없고..

그럼에도 저마다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조각상들이었다.

그런데 오호~ 통재라!

숱한 불상들이 마구잡이로 훼손되어 있었다.

목불인견~어찌 이럴 수가..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문혁 당시 홍위병의 소행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광기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고 설치던 당시 그 순간 그들은 몰랐으리라.

후손만대에 물려주어야 할 민족문화유산을 파괴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만행인가를.

고찰 영은사만은, 온건파였던 저우언라이(주은래)가 '절 입구와 대웅전 앞에 마오쩌둥 사진을 붙여놓으라'는 기지를 발휘해서 마오 사진을 본 폭도들이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도 밝혔다.

그 후 책을 통해서 영화를 통해서 홍위병의 광기를 수차  목격했다.


요즘 다시 그 생각이 문득.

일부 한국 정책 기류가 그와 유사해서다.


집단 히스테리를 넘어 집단 광기에 다름 아닌 구케원 행태와 정치권의 독단적 폭거라니.

모택동이 날아가던 참새떼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참새는 해로운 새(害鳥)다.” 그 한마디로 1958년부터 사실상 중국 내륙에서 참새 씨가 마른다. 1959년, 해충들 개체수가 엄청나게 증가하며 중국사에 길이 남을 대흉년이 벌어졌다. 동시에 기록적인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 사태로 모택동은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자 홍위병을 선동질한다. 현대판 분서갱유에 다름 아닌 “옛 것은 모조리 없애자. 문화, 교육, 정치, 가족 등 모든 것을!”이라고 외치며 문화재를 파괴하고 2천만 명의 지식인을 숙청 또는 하방 시킨다.



중국수뇌부는 4년여에 걸친 대약진운동의 참담한 실패로 당의 집행능력과 경제발전 비전에 심각한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원론적으로 좋은 말만 하는 마오쩌둥의 신격화는 가중되었다. 점점 이슬람 근본주의자 같은 무시무시한 과격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극단주의로 흐른 젊은이들은 감히 마오쩌둥을 상대할 생각은 못하고, 이게 다 관료주의와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구 문화의 잔재 때문이라 여긴다.  "경직된 관료", "주자파", "숨어있는 우파", "장제스 똘마니" 등등... 당초 공격 대상은 실제로 마오쩌둥주의를 거부하는 일부 부패관료와 구 문화의 잔재들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몇 달 전, 1968년 홍위병들이 마오쩌둥에게 조반정신을 논한 대자보를 보냈다. 모든 방식의 관료주의와 비합리에 저항하는 행동과 정신에 대한 마오쩌둥은 그 답장에 ‘조반유리’라는 문구를 넣어 보냄으로써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다. 그 결과 류사오치는 지하 감방에서 죽었고 덩샤오핑은 실각했으며 약 3백만 명의 당원이 숙청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는 더욱 피폐해지고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마오쩌둥이 권력투쟁 과정에서 정적(政敵)을  숙청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적극 이용했다. 그들의 반항을 합리화시켜 주는 구호를 내세움으로써 문기간 중에 대유행하였던 '조반유리'다.  마오쩌둥은 ‘중앙 기관이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면, 지방이 들고일어나 조반(造反:반항, 반란)해서 중앙으로 진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각지에 많은 손오공을 보내어 천궁(天宮)을 소란하게 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여기서 천궁은 당시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한 류사오치(유소기), 덩샤오핑(등소평) 등이 실권을 잡았던 당 중앙회를 말한다.  손오공은 전국의 중등학생과  대학생들로 교정에서 나와 거리를 휩쓴 홍위병을 이른다. 홍위병을 부추긴 조반유리 [造反有理], 이는 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군중 앞세워 국민을 통제해야 한다는
마오쩌둥과 홍위병이 함께 짝 맞추어 외친 조반유리 정신에는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광란의 사육제가 곧장 연결된다.

홍위병 [紅衛兵, Red Guards]은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1976)의 일환으로 준군사적인 조직을 이루어 투쟁한 대학생 및 고교생 집단이다. 1966년, 규모 약 천 삼백만 명이 동원됐으며 그들의 주요 활동은 단체 행진 및 회합, 폭력을 조장하는 열렬한 선전 활동을 가열차게 펴나가는 일이었다.

홍위병은 이처럼 급진적인 젊은이들로 구성된 집단으로, 이들은 중국공산당 주석 毛가  당 내의 개혁파들과 싸우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홍위병은  1927년 마오쩌둥이 조직했던 부대의 이름이지만, 당시의 홍위병은 자신들이 새로운 혁명 집단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에 남아 있는 모든 낡은 요소들을 제거하고 정부 내에서 자본가적인 요소들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러면서 자체 신문을 발간하고 자신들의 강령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대자보를 남발하다시피 했다. 그처럼 수많은 지식인들과 전통적인 학문이나 교리들을 비판하고 권위를 파괴하는데 앞장선 그들.

1960년대 중국공산당의 청년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은 오로지 마오쩌둥을 지지하고자 투쟁하였다. 1966년 당 주석 마오쩌둥이 '수정주의적' 당국자, 즉 마오쩌둥이 만족할 만큼 혁명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의 당 지도자들과 맞서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하여 중국 공산당의 주관 아래 만들어진 어용조직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를 통해 동료들에게 빼앗겼던 당의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66년 7월 후베이성 우한에서 장강(揚子江)을 헤엄쳐 횡단한 다음 “거센 풍랑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인류사회는 거대한 풍랑 속에서 발전했다.” 고 외쳤다.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일주일 후, 인민일보와 해방군보에 똑같은 사론이 실렸다. “마오 주석과 함께 거센 풍랑 속으로 전진하자.” 언론이 정치에 밀착 기생하면 이처럼 선동질의 도구로 추락해 정론직필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홍위병은 한동안, 타오르는 들불처럼 중국 전역을 불살라 초토화시켰다. 정부기관 등을 무력으로 장악하였고, 음악과 무술, 전통문화 등은 죄다 부르주아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며 금지해 버렸다. 청소년들은 아버지나 할아버지 뻘인  대학교수, 예술가, 학자 등등 지식인과 정치인 등을 억지 죄명을 붙여 끌어내 길거리에서  공개처벌을 가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핵미사일 연구진까지 반동 지식인으로 몰려서 두들겨 맞고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마오쩌둥의 전투적인 지시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모든 거리 이름과 간판 등을 모조리 '화약냄새'나 폭탄, 총, 칼 따위처럼  혁명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으로 바꿔버렸다고 하니  문화 혁명은 문화말살이자 문화숙청에 다름 아닌 행태였다.

 
옛 것, 낡은 문화, 사상, 풍속은 모조리 숙청하라. 니들 부모까지도!!! 반란이 정당하다(造反有理)는 이념주입, 정치세뇌, 공포정치, 대중동원, 정치숙청이 일상화됐다.  이런 환경에서 교육받고 자란 이들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들은 희대의 광인집단으로 변모했다. 제갈량의 제갈초려(무후사)는 제갈량이 지주분자라는 이유로 훼손당했다. 염제릉, 순제릉, 장군묘는 '제왕장상'의 묘라서 파묘당했다. 왕희지의 능묘, 항우의 패왕묘, 왕양명의 문묘와 공자의 묘가 파헤쳐지고 수천 년을 내려오던 향촌의 유교적 질서도 뿌리째 뽑혔다. 문묘에 제향 하는 의례조차도 사라져 한중수교 이후 한국의 석전대제를 참고해 재현했다고.


문화혁명의 먹구름이 전 중국을 휘감았다. 적과 동지를 확실히 갈라치기하고는 반대파에겐 과격한 폭력을 가했다. 별것도 아닌 몇십 년 전의 공과(功過)가 도마 위에 올랐다. 사람들은 분열되고 당도 분열됐다. 홍위병도 마찬가지였다. 혈통 좋은 집안과 나쁜 집안 출신들로 패가 갈렸다. 충돌할 때마다 총질과 몽둥이질과 칼부림으로 유혈이 낭자했다. 출신성분이 나쁜 집안의 자녀들은 자기 부모 고발에 앞장섰다. 이런 패륜에 지옥도 같은 아수라장이 거리마다 연일 벌어졌다.

1966년 수백만의 홍위병들이 베이징으로 집결하여 마오쩌둥과 함께 8회에 걸쳐 대규모 집회를 가졌으며, 전국적으로 그 수는 천 백만 명에 달했다. 홍위병들은 행진과 열렬한 선전활동에 참가하는 한편, 각 지역의 당 지도자들은 물론 교사, 지식인과 전통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고 박해하였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로 억울하게 처형당하였다. 중국발 반달리즘의 극치였다.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을 비롯한 지도층은 권력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냥 물러난 정도가 아니라 이인자였던 류샤오치는 홍위병에게 잡혀가 처참하게 고문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했다. 당서기 덩샤오핑도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집단농장에서 수년간 강제노동을 했다. 그의 아들 덩푸팡은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라며 자살을 강요받았다. 살아남기는 했지만 평생 하반신 불구로 살게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장애인들의 인권을 위한 운동가로 활동했다. 그 사이에 마오쩌둥이 다시 한번 최고권력을 굳건히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쯤, 마오쩌둥조차도 홍위병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홍위병들은 파벌분열과 반목을 일삼으며 자기들끼리도 싸움질을 벌이게 되었다. 심지어 마오쩌둥의 아버지가 부농이라고 공격하는 대자보를 붙이기에 이른다. 결국 마오쩌둥과  공산당 지도부에서는 1968년 홍위병 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운동의 정지를 명했다. 또한 68년에서 69년에 걸쳐 대대적인 '상산하향운동'을 진행하였다.



이 운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젊은 학생들은 농민에게 배워야 한다'면서 학생들을 농촌으로 추방해 버린 것. 처음에는 젊은이들도 좋아서 따랐지만 곧 그들은 낙후된 중국 농촌의 현실에 지치고 말았다. 이 조치는 홍위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이 역시 너무 지나친 나머지 젊은 인재들이 도시에서 빠져나가며 결국 학력붕괴가 발생, 무학 세대가 생겨났다고 할 정도로 중국 앞날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럼에도 문화혁명은 1976년 마오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데. 결국 광기가 지배했던 긴 세월 동안 중국은 호황기를 놓치고 실기를 만회하느라 전 인민이 공장노동자가 되어야 했으니.

이 가공스러운 사태로 중국은 몇 십 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실정이라는데 양식 있는 대부분이 동의할 게다. 정책면에서도 비슷한 행태가 자주 노정되고 있는 바, 몇몇 분야의 심각한 질적 후퇴가 우려되는 현 상황이다. 타인행위에서, 지나간 역사 행간에서, 우리는 취할 건 취하고 배울 건 배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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