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공감을 잘했던 것 같다. 옆에 친구가 울면 나도 슬프고, 드라마를 보면서도 감정이입을 하고 같이 운다. 요즘은 유투브에서 '사회 실험 카메라' 같은 걸 보며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예전에는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프로를 보며 울기도 하고, ARS로 전화를 걸어 용돈을 쓴 기억도 있다. 난 확신의 Feeler다.
남편은 이성적인 사람이다. 난 가끔 남편을 보며 로봇인가? 감정이 없나? 라고 느낄 정도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 변화가 잘 없다.
"T발 C야?"
이 말을 듣고 격하게 웃으며 남편에게 쓴 적도 있다. 내가 시험관 시술로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던 날에도, 처음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에도 나는 엉엉 울고 남편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10년간 그가 우는 걸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확실한 Thinker다.
사람의 성향은 누가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걸 알기에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남편과 나의 의견 차이가 생길 때,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공감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가끔 느낀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들이다.
상황 1)
더운 여름, 길을 걷다가 농사 지은 쪽파를 파는 나이 많으신 할머니를 발견한다. 나는 남편에게 묻는다.
"현금 있어?"
"왜? 저거 사서 네가 요리할 거야? 어차피 버리게 될 건데 왜 사?"
대부분은 내가 이긴다. 꾸역꾸역 할머니에게 현금을 쥐어드리고 사와서 인터넷을 찾아 뭐라도 만든다. 남편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상황 2)
예를 들어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TV 프로를 보고 있다. 많이 아픈 아이의 상황이 나오고 나는 이미 코가 빨개져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돈 보내자."
"저기에 돈 보내도 어차피 쟤한테 안 가. 진짜 돕고 싶으면 후원 계좌나 직접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난 결국 만원이라도 ARS를 통해 돈을 보낸다. 남편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다.
뭐지? 측은지심이라는 게 아예 없나? 동정심도 없나? 왜 저렇게 냉정하지?
상황 3)
회사에서 팀장님 때문에 속도 상하고 화가 나는 날이다. 나는 집에 와서 남편에게 다다다 있었던 일을 읊으며 팀장님 욕을 한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런데 있잖아."
"응?"
"네가 잘못한 건 진짜 없어?"
"T발C야???"
대화는 거의 이렇게 끝난다.
상황 4)
너무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그만둘 생각은 사실 없다.
"그만두고 싶어. 다른 일 알아볼까?"
"OO야. 네가 가장이라고 생각하고 일해. 그럼 버틸 수 있어."
알고 있다.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 무게 같이 지겠다고 나도 일하고 있는 거고. 그런데 굳이 저렇게 말해야 하나?
상황 5)
마트에서 사온 빵이 너무 맛있다.
"이거 너무 맛있다. 경비 아저씨 좀 가져다 드릴까?"
"왜?"
"힘들게 일하시니까?"
"굳이?"
난 나눔을 아까워하는 듯한 남편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남편은 자꾸 퍼주기만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처믕에는 나는 공감을 원했다. 하지만 10년 동안 남편과 나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데 공감해달라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어쨌든 내가 저런 일들에 돈을 쓰는 것에 대해 남편은 이제 그러려니 한다. 생활비 내에서, 혹은 내 용돈으로 하는 것에는 터치하지 않는다.
남편이 왜 그러는지 사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우리는 빚이 있고 돈도 모아야 하고 노후도 준비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는데 왜 남에게 돈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남편은 아끼고 절약하는 게 어릴 때부터 몸에 베어있는 사람이고, 난 어릴 때(망하기 전)의 허세를 버리지 못한 걸 수도 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굴 도와.' 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내가 이런 것을 지나칠 수 없는 건 돈이 많아서가 절대 아니다. 내가 베푼만큼 내 아이에게,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 오지랖이라고 욕해도 착한척이라고 해도, 주제에 안 맞게 누굴 돕는다고 비웃어도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남편은 성악설을 믿고, 베풀어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저 다름이다.
나의 인생 버킷리스트가 있다. 총 11개인데 아직 이루려면 멀었다. 그 중 2개가 이거다.
1.집앞에 택배 아저씨들을 위한 음료/간식 상자를 두고 싶다. 여름이면 아이스박스면 좋겠다.
-지금도 자그맣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남편의 한숨이나 쓸데없는 짓 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2.아프거나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
-유니세프,초록우산, 세이프칠드런에 아주 조금씩 기부는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결연을 맺고 그 아이가 클 때까지 도와주는 일이다. 그러려면 사실 그 돈이 아깝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직 하지 못하고 있다. 하다가 그만두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니까.
아주 예전 노래인데 쿨의 '좋은 세상 만들기' 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나한테 억만금이 생기면 나는 나를 위해서만 쓰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억만금이 없어서 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다. 올해부터는 조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