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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매진 Oct 15. 2019

설리를 보내며

You know she is so beautiful

씁쓸한 죽음이다.


어느 죽음인들 안타깝지 않겠느냐만은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의 죽음은 가까운 이의 죽음만큼 놀랍고 안타깝다. 내 기분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니까, 상담받고 있는 내담자분들이 이런 사건들에 영향받지는 않을까 걱정도 동시에 든다. 그리고 나는 알지 못하지만, 지금도 누군가가 자살시도를 완수하는 순간일 수 있다는게 더 좌절스러운 날들이다.


죽음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이 덤덤해질 만큼 사는게 힘겹고 의미가 없어 선택하는 일이라는 것에서 모든 자살은 이유가 같다. 하지만 국내 연예인의 자살은 조금 더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국내 연예인이라고 굳이 수식한 것은 국외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은 사회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무엇보다 학원형 조기교육으로 연예인으로 길러져 평생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삶에 대해 선택권이 없어지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자살을 완수한 최근의 연예인 연령층이 과거보다 낮아지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데뷔 연령 층이 낮아지면서 경력으로 보면 중견에 비교할 만큼 그러한 생활을 오래 해왔으며, 오롯이 어린이로 살았어도 모자랄 어린 시절에 모두와는 다른 생활을 하며 주인공으로 살다가 이내 무대 뒤에서는 혼란감을 느끼며 피폐해지기 쉽기에,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번 일이 모두에게 조금 더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설리는 그래도 사람들 앞에 나와,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일 것 같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고, 따지고보면 욕먹을만큼 잘못한 일 하나 없는데 내가 왜 숨어야 해? 라고 물음표를 던지던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무대 뒤의 사람들에게는 여러 번 사인을 보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깊은 구덩이에서 끝내 나오지는 못했던 것 같다.


SES, 핑클, HOT가 나오던 첫 세대 아이돌의 시절에도 그들의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회는 조금 더 '어린', 조금 더 '완성형의' 조금 더 '매력있는' 아이돌을 원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로소 '완제품'으로 보게되는 그들의 나이보다 더- 어린시절에 아이들은 자본과 거대 기획사의 요구에 맞춰 '이게 맞는가보다', '이렇게 하니 사람들이 사랑해주는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연스레 자라나는 여러가지 감정들은 무시되고 억압된 채 청소년기를 보내며 모두가 좋아하고 만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가면을 써야 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결국 자신을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야만 가치있는 존재'로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기준들이 있다.


살 찌지 않을 것.

너무 말라서도 안될 것.

눈은 크고 코가 높고 얼굴이 작으며 다리가 길 것.

어느 각도에서든 완벽할 것.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상냥하고 예의 바를 것.

(팬들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제한할 것.

절대 도전적이지 않고 수동적일 것.


위와 같은 기준에서 벗어났을 때 어떤 질타가 쏟아지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이외에도 나는 괜찮지만 너는 안되는 기준들이 수두룩하다. 섹시하지만 섹스하지 않고, 터프하지만 싸우지는 않아야 한다는, 가수 김동완이 남긴 글이 깊이 와닿은 이유가 그것이다.


사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아야만 성공적인 직업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 가혹하도록 엄격하다는 것과, 인생과 직업을 동일하게 볼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성장과정에 있다. 아이돌 산업이 승승장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려할 수 밖에 없었던 학원형의 대형 연예기획사가 연예인을 배출해내는 과정과 모두의 기준에 맞춰야만 한다는 국내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결국 이리저리 흔들리다 중심을 잃어버린 종이인형들을 마구 생산해낸 것이다.


아이들은 적어도 청소년기를 지나며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타인의 욕구와 나의 욕구를 구별하는 것, 때로는 친구들과 싸우고 화해하며, 시험을 보고 좌절하거나 기뻐하며, 여러 영역에서 성공 경험을 해보는 것, 최대한 사회의 많은 부분을 경험하는 것, 적어도 사장님이나 감독님보다는 나를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해주는 부모님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히 필수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연예계, 이름만 들어도 눈부신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이따위 소소한 일상따위는 버리고, 기꺼이 정서적 학대를 감내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생각한다.


정서적 학대를 감내한 채 맞게 되는 세상은 '말, 말, 말'의 세계이다. 사람들의 말은 실체가 없으나 지독하다. 특히 평가와 비교가 난무하는 한국의 문화에서 연예인에 대한 언급들은 모두 외모와 인성에 대한 평가이고, 그 수도 많다. 그러나 역시 실체가 없는 말들은 상황에 따라 파도처럼 쓸려가고 사라지며 다시 밀려온다. 누군가의 죽음 전후로 갈아엎어진 베스트 댓글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실체 없는 사람들의 말이 당사자의 세계에는 세상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희망을 보고 달려온 어두운 터널의 끝이 두껍게 막힌 벽이라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건 아닐런지.


누구의 탓을 할 수 없는 죽음이나, 모두의 탓이다.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할 지 모르겠으나, 바뀌지 않을 것을 알아서 가슴 아픈 날이다.


You know she is so beautiful,

Maybe you never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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