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는 성인들을 종종 만난다. 그들은 상담을 받으러 일단 문턱을 넘으면 거의 등록을 한다. 처음엔 이런 행동 패턴이 상당히 신기했고 의문이 들었다. 왜 고민 없이 바로 등록을 하는가? 직접 그들을 가르쳐보니 답이 나왔다. 그 만학도들이 상담을 받으러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의 관문을 넘었을지를 생각한다. 시간도 없고, 나를 위해 쓸 돈도 없으며 이 나이에 악기를 배워서 제대로 연주라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숱하게 몇 십 년에 걸쳐했을 것이 보인다. 그 긴 고민 끝에 찾은 기회를 바로 잡은 것일 뿐이다.
어려서 너무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는데 우리 집 형편이 좋지 않았어요.
언니랑 오빠는 배웠는데 제 차례는 오지 않았어요.
엄마가 어릴 때 가르쳐줬는데 제가 그때는 소중함을 몰랐어요.
성인들이 악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어린 시절에 악기를 못 배운 한풀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질문을 한다.
"너무 늦지 않았나요?
작년 늦여름, 아이를 데리러 가끔 오시는 어머님이 성인 피아노 레슨비 문의를 하셨다. 아이들 사교육비가 많이 드는 시기이니 어머님이 몇 달은 고민하고 오실 것 같았는데 "내일부터 시작할래요~"하시고는 다음날부터 나의 학생이 되었다.
직접 만든 손가방에 악보를 넣고 일부는 팔에 안고 레슨을 받으러 오시는데 그 발걸음이 참 가볍다.
"피아노 재밌으세요?"
"네, 너무 재밌어요!"
주 3회, 레슨을 미루거나 늦지도 않고 그렇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피아노를 배운 지 6개월.
"혹시 치고 싶은 곡이 있으세요?"
"어,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 나오는 쇼팽의 이별의 왈츠가 궁금해요. 너무 좋더라고요.."
그 왈츠는 플랫이 4개나 붙은, 초보에겐 너무나 어려운 곡이었다. 하지만 나는 만학도의 열정을 믿었고 오른손부터 레슨을 시작했다. 천천히 진도를 나가려던 나와는 달리 드라마에서 듣던 음악이 본인의 손에서 흘러나오니 학생의 마음에 불이 붙었다. 오른손만으로도 이렇게 좋으니 왼손도 따로 연습하고 양손도 붙여보고 안 되면 다시 각각의 손을 연습하고 다시 붙여 보고...
그렇게 6개월짜리 초보 학생은 쇼팽의 이별의 왈츠를 마침내 연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듣기 좋게. 물론 중간의 어려운 부분은 선생의 권한으로 들어냈다. 하지만 이미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나는 그분에게 '성인 영재'라는 특급 칭찬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hqaltlqLtE
성인들이 악기를 배우는 데 있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너무 늦지 않았나요? 손이 굳어서 힘들지 않나요? 이 두 가지다. 일단 손이 굳은 사람은 없다. 젓가락질을 할 수 있다면 손은 기능을 할 수 있다. 하루에 10시간 넘게 연습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하루, 이틀 연습을 게을리하면 '손이 굳는다' 는 표현을 할 수 있으나 일반인은 그럴 일이 없다. 그러니 나이가 많아서 손이 삐걱거릴 걱정은 넣어두시길.
너무 늦지 않았냐는 질문은 정말 많이 받는데 내가 가르치는 성인 학생 중에 60대 학생이 가장 열정적이다. 노안으로 악보를 보는데 조금 힘이 들지만 레슨에 빠지거나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진도가 빠르진 않아도 시간이 쌓여 실력이 된다. 이 분은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8년 정도 피아노를 배웠으니 10년을 채워가는 학생이다. 10년은 갓 입학한 초등학생이 고등학생이 되는 시간이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자신만의 음악을 쌓아 올렸다. 그 음악 세계는 깊고도 단단하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악기를 직접 배워보겠다고 용기를 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수많은 생각과 좌절 끝에 용기 내어 배움을 희망하는 사람에게 늦은 것은 없다. 나이는 그저 나이일 뿐이다.
건반 위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 있음을 감사하는 나의 만학도들에게 나는 오늘도 감동을 선물 받는다. 성인 제자들이 사랑스러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