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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Jan 20. 2020

차마 볼 수 없는 영화, 첨밀밀

첨밀밀



저도 아직 못 본 영화를 추천드립니다

보시고 어떤지 좀 말씀해주세요


나에겐 차마 볼 수 없는 영화가 한 편 있다. 진가신 감독, 여명, 장만옥 주연의 영화 <첨밀밀>이다. 내겐 1998년 1월의 어느 토요일 그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를 놓친 이후로는 다시는 영화를 볼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중학생이 된 나는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접하고 있었다. 혼자서는 멀리 나가봐야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수 없었던 초등학생 시절과 달리, 중학생이 된 이후 나는 시내 중심가를 들락거릴 용기를 냈다. 반 뼘쯤 더 어른이 됐다고 믿은 까닭이었다.


얼마나 신이 났겠나. 중학생이 됐다고 용돈도 전보다 더 많이 받기 시작하고, 모르는 어른들이 날 부르는 호칭도 ‘꼬마야’에서 ‘학생’으로 바뀌었으며, ‘중학생 이상 관람가’ 영화도 보호자 없이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 흥분이 좀처럼 가시지 않던 나는 중학교에서 새로 사귀게 된 친구들과 함께 종로니 홍대니 돌아다니며 큰 극장과 서점들에 놀러가곤 했다. 전에 없던 도락이었다.



그 날, 98년 1월의 어느 토요일도 난 친구와 함께 충무로에 있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로완 앳킨슨의 전설적인 캐릭터 ‘미스터 빈’이 등장하는 첫 극장 장편 코미디 <빈>이었다.


TV시리즈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우리의 기대와 달리 극장판 <빈>은 좀 잡다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대사도 거의 없이 짧은 호흡의 농담들로 채워진 25분짜리 코미디 단편들에서 활약하던 캐릭터를 기반으로, 2시간에 가까운 극장용 장편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 건 실패확률이 굉장히 높은 모험이니까.


하지만 어린 나는 그런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리던 마음이 다소 차게 식은 채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마침 엄마와 작은누나도 외출 후 막 돌아온 참이었다. 흙먼지가 묻은 작은누나의 휠체어 바퀴를 엄마가 물걸레로 열심히 닦아내고 있었는데, 작은누나의 손에는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비디오 테이프가 들려있었다.


“승한아, 저녁 먹고 영화 같이 안 볼래?”

“무슨 영환데?”

“<첨밀밀>이라고, 홍콩 영화야.”


막 방금 극장에서 돌아왔는데 또 영화라니, 어쩐지 피곤했다. 안 그래도 오늘 본 영화가 실패로 끝났잖아. 잔뜩 기대하고 본 작품도 실망스러운 판에, 전혀 사전 정보가 없는 작품을 또 도전하자고? 구미가 영 당기지 않았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누나, 미안한데
내일 보면 안 될까.
나 영화 보고 들어오는 길이라.


작은누나는 순순히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함께 앉아 <첨밀밀>을 보는 내일 같은 건 없었다. 오랫동안 우울증과 조현병을 앓고 있었던 작은누나는, 그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미리 계획한 듯한 방법이었다.


한 몇 개월 상태가 호전되고 있던 터라 엄마와 나 모두 조금은 방심하고 있었는데, 깊은 우울증은 오히려 호전되려고 하는 찰나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그 때의 우리는 미처 몰랐다.


처음 몇 년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날 내가 누나를 혼자 집에 남겨두고 외출하지 않았더라면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죽음이었단 걸 감안하면, 그 날이 아니었더라도 누나는 언젠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을 납득하는 데는 한 10년 정도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은 <첨밀밀> 생각을 했다. 그 날 내가 극장판 <빈>을 보러 가는 대신 누나와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 <첨밀밀> 비디오 테이프를 봤더라면, 누나도 그 영화에 대한 감상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라도 며칠은 더 살아있지 않았을까?



누나가 떠난 지 22년이 지난 지금은, 그냥 누나와 <첨밀밀>을 볼 걸 그랬지 하는 생각 정도만 한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생과 보고 싶어했던 작품이었을 텐데, 기왕이면 영화는 좀 보고 갔으면 좋았을 것을.


누구에게나 차마 볼 수 없는 작품 같은 게 한 편쯤은 있을 것이다. 애인과 헤어지던 날 같이 보러 갔던 영화라거나, 개인적인 공포를 너무 심하게 자극해서 도저히 도전할 수 없는 공포영화 같은 거. 나한테는 <첨밀밀>이 그런 작품이다.


작은누나의 기일이 돌아오는 어느 날, 나는 왓챠 플레이가 ‘이승한님이 좋아할 것 같은 작품’이라며 <첨밀밀>을 추천해주는 걸 보고 혼자 웃으며 중얼거린다.


나중에, 나중에 볼게요.
그 작품은 누나랑 같이 보기로 한 작품이라서.



첨밀밀, 지금 볼까요?


이승한 / 칼럼니스트


열 두살부터 스물 세살까지 영화감독이 되길 희망했던 실패한 감독지망생입니다. 스물 넷부터 서른 여섯까지는 TV와 영화를 빌미로 하고 싶은 말을 떠들고 있죠. 자기 영화를 왓챠에 걸었으면 좋았으련만, 남의 영화를 본 소감을 왓챠 브런치에 걸게 된 뒤틀린 인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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