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2012)
말싸움에 소질이 없던 나에겐 이만큼 효과적인 반격기가 없었다. "반사!"보다는 좀 더 구성진데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퍼붓는 상대의 디스 랩을 듣다가 툭, 뱉으면 그만.
그런데 이 말은 방어기제 중 하나인 '투사'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 투사(投射, Projection): 불쾌한 원인, 받아들이기 힘든 충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거나 반응하는 것
투사는 쉽게 말해 나의 생각을 상대에게 던지는 것이다. 따라서 "날씨가 덥다. 냉면 먹고 싶지 않니?"와 같은 '가벼운 권유'에서부터 '자격지심, 원망, 질투, 의심, 집착' 등 대인관계에서 오가는 다양한 상황이 투사의 결과일 수 있다. 어떤 생각을 던지는가에 따라 그 유형이 달라지는데, 오늘은 <건축학개론>의 승민(이재훈 분)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상황'을 대입해보려고 한다.
승민은 아직 사랑이 서툰 새내기 대학생이다. 가뜩이나 쉽지 않던 승민의 첫사랑은 강남과 강북으로, 부유와 가난으로, 능숙과 미숙으로, 멋진 선배와 숫기 없는 신입생으로 대조되면서 극악의 난이도로 진입하게 된다. 묘하게 어긋나는 상황 속에서 그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투사하게 될까. 일기장을 훔쳐보자.
#1.
수업 시간. '등하굣길'을 표시하기 위해 칠판 앞에 섰다. 내가 선을 그어야 할 곳에는 이미 다른 사람의 선이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서연이와 나는 같은 동네에 산다. 과제 때문이긴 하지만 단둘이 개포동에 갔다. 이어폰을 나눠 끼고 노래도 들었다. 자기 집 얘기도 해줬다. 그런 얘긴 친한 사람에게만 하는 걸 텐데.
#2.
서연이가 좋다. 그런데 서연이는 재욱 선배와 친해지기 위해 방송반에 들어갔고 건축학개론 수업도 듣고 있다. 재욱 선배는 세련되고 말도 잘하는 엘리트다. 차도 있고, 돈도 많다. 그 선배를 싫어하는 여자 후배는 본 적이 없다. 왜 다들 선배를 좋아하냐고 묻자, 키도 크고 잘 생겼고 돈도 많으니 인기 많은 게 당연하단다. ‘너도 좋아하냐’고 묻자, 화를 냈다. 더 묻지 못했다.
#3.
엄마 가게 앞에서 우연히 서연이를 마주쳤다. 배고프다며 이 가게에서 순댓국을 먹자고 한다. 가게 주인인 엄마는 옆 가게 아주머니와 악다구니를 치며 다투고 계셨다. 난 순댓국을 잘 먹지 못한다고 말했다.
#4.
재욱 선배가 서연이와 나를 바래다줬다. 선배의 옆자리에 그녀가 앉았다. 대화에 끼어봤자 비교만 될 게 뻔하니 자는 척을 했다. 실눈에 들어온 두 사람의 모습이 참 잘 어울린다. 둘은 내 옷의 브랜드 스펠링이 틀렸다고 함께 비웃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티셔츠를 내팽개쳤다. 엄마가 멀쩡한 옷을 왜 던지냐며 가게 장사도 안 되는데 정신 차리란다. 선배보다 잘난 게 하나도 없다. 대문을 걷어찼다. 헐어빠진 문짝이 참 쉽게도 휜다. 이런 내가 그녀를 좋아하려고 했다니, 다 착각이었다.
#5.
서연이의 생일날, 우리는 단둘이 파티를 했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며 함께 웃었다. 그녀가 우리의 10년 뒤를 물었다. 함께 손잡고 걷는 미래를 상상했다. 그녀가 살고 싶은 집에 대해 얘기했다. 그 집을 지어주고 싶었다. 이제 그녀에게 고백해야겠다.
#6.
종강 날이 되었다. 서연이의 집 앞에서 선물을 들고 기다렸다. 날이 차가웠지만 춥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나타났다. 재욱 선배와 함께. 그녀는 취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벽 뒤로 숨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발이 바닥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그녀도 결국 재욱 선배를 택한 것이다. 나 같은 놈이 껴들 공간은 없었다.
#7.
15년 만에 그녀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나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주고도, 뻔뻔하게 나타나서는 집을 지어 달란다. 여전히 아름답다. 더 이상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 그녀가 기억나지 않는 척했다.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풀린다.
#8.
집을 완공했다. 그녀와 마지막 맥주캔을 기울였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대화가 깊어졌다. 더 이상 생각의 꼬리를 무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자리를 털었다. 문 앞에 남은 짐을 옮겨주려다 그녀의 물건을 발견했다. 내가 주려던 선물이다. 도대체 왜, 그게 그곳에 있는 것일까. 그녀는 왜 날 찾아왔을까. 이제 와서 굳이 왜.
뭐 눈엔 뭐가 보이는 게 당연하다. 우리는 누구나 내부의 생각을 바탕으로 외부 현상과 상호작용을 한다. 그럼에도 '투사'가 방어기제로 개념화된 이유는 그 수준에 따라 내/외부의 적절한 조율자가 될 수도, 혹은 날 괴롭히는 습관적 사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뭐가' 보이는 것과 '뭐만' 보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승민은 지고지순하게 서연을 좋아했다. 온종일 그녀를 떠올렸고, 같이 있는 순간에도 피부로 느끼며 행복해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지는 못했다. 재욱 선배 덕에 남루해진 승민이가 그녀와 자신 사이에서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5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항상 여길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돌아선 건 나였다는 사실을. 언젠가 걷어찼던 대문을 부여잡고 서글픈 눈물을 흘린다.
누구에게나 '승민의 대문'과 같은 상대적 현실이 있다. 그 현실을 감내하다 보면 이따금 작고 못난 내가 찾아오는데, 이를 막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인생이 아름답다고들 하지만 이 현실은 기가 막히게 좋은 결과를 주거나 속 시원하게 위로해주지 못할 때가 더 많기 때문. 내 앞에 다가온 못난이는 점점 더 선명하고 거대해져 그 너머에 대한 대부분의 시야를 차단하고 만다.
그런데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 못난이의 역할이 하나 더 있다. 이 녀석이 웬만한 못난 모습은 다 흡수를 해주니 오히려 나는 그 뒤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셈이다. 이처럼 투사는 내면을 보호하고 일종의 안도감을 주기 위한 무의식적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니 못난 녀석까지 너무 억지로 예뻐하려 애쓰진 말자. 자존감은 나의 모든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만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니까. 못난 모습 그대로 두되, 시야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옆으로 옮겨보면 어떨까. 만약 승민이 그것을 바라보려는 노력과 시간을 자신의 좋은 면모에 집중했다면, 대문 걷어찰 일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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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고래 / 작가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소심해서 좋다>, <심리로 봉다방>을 썼어요.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