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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May 03. 2019

인종차별에 대하여

지난 파리일기 


파리에 와서 나는 비주류가 됐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 했던 일들이 여기선 예사가 됐다. 차별이란 건 종류와 정도에 관계없이 모두 나쁘다고 배웠는데. 파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사람이 나쁘다.



그래서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생각하면 기분 나쁘니까. 그래도 울컥 올라오는 응어리들이 느껴질 때면 잠을 설칠 정도로 억울한 날들이 있었다. 나는 아직 직접적으로 나의 어떠함 때문에 차별을 당한 적은 없기 때문에 아직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까. 오히려 반대로 언제 당할 지 모르기 때문에 두렵다고 해야할까. 억울한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억울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때문에 하루를 망쳐버리면 어떡하지.



그러니까 이런 생각들이 차별이 나쁜 이유다. 사람을 움츠러 들게 만드니까. 내가 동양인이고 여성이기 때문에 나에게 와서 니하오 칭총챙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저 멀리서 파란 눈의 백발의 노인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같으면 몸을 움츠리게 되는 게 싫은 거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독일 친구와 밖에서 놀다가 나이트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친구는 나에게 딱히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다 나에게 '넌 아시안 치고 키가 크구나' 라고 불쑥 내뱉는 거였다. 나는 순간 기분이 나쁘면서도,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구에게 기분이 나쁜 티를 내어도 될까 망설이기 시작했다. 맘 같으면 '너는 게르만족인데 왜 키가 작니' 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의 어떤 도덕적 우월함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당황해서 어떤 말도 하지 못 하고 허허 그렇네 하고 넘겼다. 내가 나의 펠로우 아시안들을 대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못난 생각과 함께.



그리고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친구들과 영화를 보려고 길을 지나는데, 레스토랑 문턱에 있던 그 집 셰프가 우리가 말하는 걸 듣더니 'dui dui'를 외치는 것이었다. 이건 참을 수 없다 싶었고 또 친구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용기가 생겨서 너 방금 뭐라고 했냐고 따졌다.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면서 fuck off 라고 외쳐주었더니.. 그 자식은 기도 죽지 않고 oh fuck me 하며 신음소리를 내는 과연 미친놈이었던 거다. 더 설명할 필요를 못 느껴서 욕을 더 퍼붓고 자리를 떴다. 그 남자 옆엔 연신 웃기만 하던 여자가 있었다. 난 그 여자가 더 미웠다.


둘 중 뭐가 인종차별이고 뭐가 아닐까. 키가 큰 게 보편적으로, 아니 사회적으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부러운 신체적 특징이라면 그 친구는 나에게 칭찬을 하려던 거였던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신기했나. 여태껏 만나온 아시안들은 나보다 키가 작았는데 얘는 뭐지? 이런 생각이었을까. 그럼 두 번째 남자는 뭘까. 그건 인종차별이었을까.



두 번째 일에 대해선 누구든 입을 모아 인종차별이라며 비난을 했다. 그 남자가 그러면 안 됐다고. 너가 잘 한 거라고. 맞서길 잘 했다고. 근데 내가 친구들이랑 함께 있었던 게 아니라면? 내가 밤길을 혼자 걷고 있었고 누군가 나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다면? 내가 용감하게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욕을 퍼부어줄 수 있었을까.


사실 그 남자보단 그 독일 친구 같은 사람들이 나를 더 절망하게 만든다. 너가 나에게 기분 나쁠 말은 했지만, 첫 째 나는 너와 불편해지고 싶지 않고 (아직 몇 정거장 더 가야 되니까), 둘 째 내가 지적하면 넌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잡아 뗄테고, 셋 째 그럼 내가 오히려 민망해질테니까. 네가 어떻게 얘기할 지 뻔히 알고 있고 그럼 나는 별 것 아닌 일에 열을 올리는 예민한 사람이 되고 마니까. 누구도 부산을 떨고 싶진 않을 거니까.


이게 인종차별이 비겁한 이유다. 말을 꺼낸 건 넌데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해야하지? 넌 그런 말을 꺼내놓고도 집에 가서 양말을 벗어 두고 잠만 잘 잤을텐데, 나는 왜 집에 가는 길 내내 그게 인종차별인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할까?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웃고 넘길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매사에 열을 올리며 반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상이 원래 그래 라고 무던히 넘기기엔 나를 자극하는 일들이 너무 많고, 또 그렇게 살자니 견디기 힘든 세상이 될 것 같아서 (마더 테레사 아님). 반대로 매사에 독일 친구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거 인종 차별입니다 조심해주세요 기분 나쁘그든여 하기엔 내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니까. 너그럽게 웃으며 조목조목 따지는 스킬을 길러야 되는데 아직 멀었나보다.



그러다 이런 일도 있었다. 프랑스어 수업 발표를 마치고 같이 발표한 친구들과 디저트를 먹으러 갔다. 원래 친한 친구들이니까 굳이 소개가 필요 없었지만 그 중엔 우리 학교로 교환 프로그램을 하러 온 중국 여자애가 있었다. 그 친구가 자기 소개를 하고 내 친구는 그걸 찬찬히 듣더니 문득 '중국 참 재밌네' 이라고 하는 거였다. 나와 나머지 친구는 움찔했다. 문제가 될 수 있는 말이니까.



여기서 잠깐. 그건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왜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냐면- '재밌다, 흥미롭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형용사여서 화자의 발화 의도를 십분 반영하게 돼있다. 그 친구야 말 사이에 공백이 생기는 게 싫어서 불쑥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선 내 나라가 흥미롭지 않은데, 아니 사실 니네 나라랑 똑같은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므로. Exotic, ethnic, original 같은 말에 수없이 시달려 온 아시안들에겐 그건 좀 문제가 될 수 있는 말이다. 그 대화에선 누구도 눈에 보이는 잘못을 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걸 의도했을 리 없지만 아무튼 애석하게도 세상이 요지경이다.



그 중국 친구는 '나는 그 말이 재밌네' 하고 응수했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저 재치는 어디서 나오는거지? 누군가 한국을 모르면서 웃기려 들면 저런 말을 해주어야겠다 생각했다. 저런 것이 내공이구나!



아무튼 내 결론은 이렇다. 파리에 와서 살기로 한 건 내 결정이고, 아무도 내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누군가에게 외국인으로 살기로 한 건 너잖아! 하며 차별을 당연시 여길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일일히 반응해주기엔 내 기분이 너무 소중하고, 사실 좀 귀찮기도 하다. 나 할 일 많은데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도와주겠답시고 설명을 해줘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상처는 주지 말자 생각했다. 그리고 상처받지 말자고. 인종과 별개로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면 '나는 그 말이 재밌네' 하며 웃어보일 수 있는 내공을 기르는 게 나도 지키고 너도 지키는 길이겠구나. 나는 선천적으로 선한 사람은 못되지만, 어쨌거나 남의 가슴에 상처 내면 그게 곧 되돌아 온다주의이므로 그렇게 살기로 했다. 그거 참 재밌네 하하 웃으며 다시는 네가 그런 말을 하지 못 하게 만들어야지.



Ps. 사진은 내 강아지. 강아지들은 서로 차별 안 하던데. 그러니까 개새끼는 사실 좋은 말이다. 인간도 개처럼 살면 세상에 나쁜 일이 생길 리가 없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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